2020. 11. 8. 08:19ㆍ별 일 없이 산다
한국을 떠나온 지 이제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보통은 1년에 한 두 번 정도는 집에 다녀왔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다녀올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못 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더 그리워지나 보다. 생전 안 보던 한국 드라마와 예능을 집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유튜브 중독 증세도 있는 것 같다. 인간 심리가 참 이상하다. 어제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안보현이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클립을 몇 번이고 다시 보기를 했는지 모른다. 서울의 가을, 한강변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휴대폰으로 보다가, 결국은 노트북 좀 더 큰 화면으로 몇 번이고 되돌려 봤다. 예쁘다.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른다. 이 곳은 계절의 변화를 아름답게 느끼게 해주는 풍광은 없다. 나무들의 색은 늘 그대로이다. 다만 지난 몇 주 사이 기온이 크게 떨어져서, 드디어 집안이 더 추운 계절에 들어서는구나...싶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온 지 10개월이 지났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들이 집안 곳곳에 너무 많다. 올리브영에서 산 360개들이 화장솜도 - 물론 이곳에도 화장솜은 있지만, 캐리어에 짐 쌀 때 깨지지 않게 해주는 용도로 화장솜은 무게도 안 나가고 편리하다.- 매번 이걸 언제 다 쓰나 했는데 벌써 다 썼고, 한국서 가져온 뿌리 염색용 소분된 염색약도 이제는 두 개 밖에 안 남았다. 잔지바르에서 사 온 레몬 진저 마사지 오일도 다 썼는데, 빈 병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부엌으로 가면 시간의 흐름을 더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오뚜기 참기름 450ml 도 다 비운 지 오래고, 청수 냉면을 5킬로 가져왔었는데, 이제 비빔냉면 딱 1인분만 남아 있다. 골뱅이 8캔은 이제 1캔으로... 외롭게 찬장 안에 자리하고 있고, 냉장고의 고추장 된장 1킬로씩 2개 가져온 것도 거의 밑바닥을 보인다. DHL로 긴급 생필품을 한국에서부터 조달할까 싶지만, 이곳 한인 슈퍼에서도 급한 것은 살 수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둔다.
계절이 바뀌어서 이제 여름 신발도 모두 집어넣었다. 몇 주 전만 해도 에어컨을 틀었었는데, 오늘은 가스난로를 켜고 거실에 앉아 야근을 했다. 재택인데 주말 야근 모드이다. 발이 시려서 좀 두꺼운 수면 양말을 사고 싶은데, 이 동네는 수면양말이 없다. 수면 양말을 사고 싶다.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는 사소한 것들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손가락으로 몇 개월이 지났나, 알면서도 세어본다. 다음 달부터는 열 손가락으로는 부족해지는 시간이 된다. 통금이 없는 주말, 특별히 살 것도 없는데 근처 대형마트에 가서 화장솜을 사 왔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느라 화장도 잘 안 해서 화장 지울 일도 없으니 그만큼 자주 쓸 일도 없는데, 왠지 화장솜을 채워놓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왠지 지나간 시간이 다시 돌아올까 싶어서.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뭐 드라마 <호텔 델 루나>는 말이 되어서 그렇게 감동을 주는가? 말이 안 되어도 그냥 의지하고 싶어 지는 사소한 것들... 그런 사소한 것들을 화장솜 상자에도, 내 마음에도 잘 채워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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