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7. 06:06ㆍ별 일 없이 산다
5월 30일 날 글을 하나 올리고 6월 한 달은 하나도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국가봉쇄와 통금이 조금씩 풀리면서 업무도 조금씩 재개되어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기록을 남기는데 게을러질 줄은 몰랐다. 40대가 된 이후 가장 큰 변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게으름이라고 답하겠다.
기록할 만한게 없었던 것 아닐까,라고 나를 위로해보고 싶었지만 사실 너무나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블로그를 꾸준히 썼던 30대 초반보다 이후 40대부터 훨씬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았는데,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정작 정말 중요한 일과 당장 급한 일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데 실패한 것 같다.
6월만 해도 그래. UN기구들과 NGO에서 내놓는 보고서와는 다른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바쁘다는 핑계로 정리를 못했다. 왠지 삶 자체가 정돈되지 못하는 느낌이다.
6월을 이렇게 그냥 넘길 수 없으니, 자잘한 일상의 기록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면,
1. 그래 너 잘났다.
성기반 폭력에 대한 온라인 워크숍에 참여했어야 했는데, 업무상의 연관성은 없지만 행정직원도 들어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들도 초대를 했다. 물론 주최기관이 염두에 두었을 참가자의 수준을 고려했을때 이들을 초대하는 게 괜찮을까, 잠깐 우려를 했지만 그래도 기회를 주고 싶어서 함께 했다.
성기반 폭력은 고사하고 NGO 실무 경험이 전무하지만, 인도적지원에 대한 열정이나 자세가 좋고 무엇보다 회계 프로그램을 잘 다루기 때문에 파트타임으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디아나 (가명)는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한다. 이번 워크숍에도 그녀는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전문 지식은 부족하지만 모든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애썼다. 누가보더라도 조금 투박할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뭔가를 감지했다.
디아나는 강사가 주변에서 흔히 발생하는 성기반 폭력에 대한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physical abuse로 정리될 수 있는 상황을 부족하나마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고, 다들 인내심있게 들어주었지만 그 이후 올라온 답들은 전부 관련 분야 축약어들이어서 GBV (Gender based violence 성기반 폭력)이 뭐냐는 질문부터 시작한 디아나는 도무지 알아들수 없었다.
처음 한 번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려고 했는데, 계속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니 의도적으로 축약어만 사용하는 일부 몇몇 참가자가 정말 실망스러웠다. 인식증진이라는 것은 따로 시간과 돈 들여서 뭔가 액티비티를 디자인하여 수행하는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전문가로서 갖추어야 할 배려심이 아쉬웠다.
디아나의 성폭력에 대한 민감성과 공감능력은 그들이나 나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 단지 그녀가 이 바닥 전문 용어를 모른다고 약점을 바탕으로 미묘하게 차별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몇몇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래 너 잘 났다.
그리고, 디아나에게 조용히 마음으로부터의 박수를 보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그녀의 자신감과 주눅 들지 않고 목소리를 내려는 그녀의 꾸준한 노력과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2. 두 번째 헤어컷
이 곳에 온지 이제 5개월이 지났다. 머리를 마지막으로 자른 게 1월 10일경이었기 떄문에 국가 봉쇄와 통금이 계속 이어지던 기간 중에는 머리가 정말 많이 자라 어깨에 닿고도 한 3센티는 더 내려왔다. 통금이 너무 오래되면서 약간 정신병이 생겼는지, 내가 직접 잘라볼까, 하고 가위를 들고 거울앞에 선 적이 정말이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르고 싶은 것이 머리카락뿐만은 아닌, 그런 심리적 상황까지 코로나는 나를 몰고 갔었다) 그러다가 4월말부터 정부가 조금씩 영업활동 중단을 해제하는 분야가 늘어났고, 그 중 하나가 미용실이었다.
미용실 영업이 재개되자마자 그동안 통금이 해제되는 낮 기간에 산책하면서 눈여겨봐 두었던 미용실로 달려갔다. 마스크를 쓰고 머리를 자르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마스크를 안쓰면 불법이라 모두가 마스크를 썼고, 서로가 왠지 어색했다.
누가보더라도 한눈에 미용사임을 알아볼 수 있는 차림의 아저씨가 – 어쩌면 또 동생뻘이 될 수도 있겠지만 ㅜㅜ- 아주 능숙하게 머리를 잘라주셨다. 머리 자르기 전후 샴푸에 자른 후 드라이까지 아주 꼼꼼히 잘해주셨다. 비용은 15 JOD라고 했고, 한국과 비슷하네, 하면서 이곳 물가가 워낙에 비싸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가 또 두 달이 지난거지. 머리는 그새 또 길게 자라서 어깨에 닿았다. 기온이 35도를 넘어서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머리카락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숱도 많고 머리카락 자체가 좀 두꺼운 편이다. 이번에도 그 미용실에 갈까 하다가, 산책길에 봐 둔 – 간판이 훨씬 더 크고 입구가 화려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나 왠걸, 그 미용실 실내는 밖에 야심 차게 내걸은 간판만한 면적의 매우 소박한 모습이었다. 뒤돌아 나오려고 했는데, 주인 아주머니 – 어쩌면 또 동생뻘일 수도 있다 ㅠㅠ- 가 너무 반갑게 맞아주시고 내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으시려는 자세를 취하시는 바람에 그대로 걸어 나올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영어를 하실 수 있었다. 사진을 보여주고 이렇게 저렇게 잘라달라 부탁을 하고 안내해준 의자에 앉았다. 안내라고 해줄 것까지도 없었다. 의자는 단 두 개뿐이어서 말이지.
거울 앞에서 이런 저런 수다를 나누며 한 시간쯤 머리를 잘랐을까. 이 미용사는 샴푸도 안해주고 얼굴에 뭍은 머리카락도 안 털어주고,드라이도 안 해준다.하지만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부다비에서 호텔 마사지를 하다가 미용기술을 배워서 이곳에 정착한 이집트분이셨다. 사실 이 분은 머리 자르기 전에 거의 내 어깨와 뒷목 마사지를 10분 가까이해주셨다. 발단은 내가 머리를 어깨에 닿지 않게 잘라달라는 부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 근데 어깨가 왜 이렇게 뭉쳤지? 목뒤 어깨 근육이 너무 솟았어. (우리 모두 승모근이 영어로 뭔지 모르는 사람들) 이걸 가려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머리가 어깨에 닿아야 목도 길어 보이고 더 여성스러워 보일 것 같아. 정말 귀밑 조금 길게 내려오는 길이로 자를 거니?’
나에게서 재차 머리 길이에 대한 확답을 여러 차례 듣고 나서야 마사지를 멈추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잠깐의 마사지였는데 정말 피로가 쫘악 풀리는 기분이었다. 탄자니아에서는 그래도 교통사고 이후 정기적으로 마사지를 받으면서 통증을 풀었었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는 단골 마사지 숍을 만들기는커녕 코로나 때문에 단 한 번도 마사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미용실에 와서 공짜로 선물 받은 이 10분이 참 여유롭고 좋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4 JOD 였다. 멋쟁이 미용사 아저씨의 근사한 숍보다는 훨씬 훨씬 후지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이 곳이, 위생상태는 어떨까에 대한 의문마저 잠재우며 갑자기 더욱 맘에 들어졌다. 5 JOD 지폐를 건네면서 잔돈은 가지세요. 감사합니다, 하고 기분 좋게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세나이고 나는 나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일 없을 그녀에게 수고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쉬운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젠 한 달에 한 번씩 머리를 자르러 이곳에 오게 될 것 같다. 조금씩 마음이 가는 곳이 하나둘씩 생긴다.
몇 가지 더 쓸게 있는데 졸리다. 이렇게…일상은 사소하며 구체적으로 조금씩 자리 잡아가겠지. 코로나 이후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예측이 많은데, 다 모르겠고, 시간이 흐르면 우린 또 무디어 질 것이라는 것… 그것만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겠다. 이렇게…일상은 사소하며 구체적으로 자리 잡아갈 것이다. 내가 단골이 될 후보 미용실을 찾은 것처럼. 지극히 사소하게…일상은 자리 잡겠고 인간은 또 익숙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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