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6] 1년 놀아도 안 죽어-띄엄띄엄 제주걷기 14 : 뒹굴뒹굴 빈둥빈둥, 그리고 놀아도 놀아도 더 놀고 싶은.

2021. 10. 17. 01:34별 일 없이 산다

 

천제연로 올레 8길 - 2021년 7월 

 

  1. 갑자기 기온이 10도 이상 내려갔다. 제주 전역에 강풍주의보가 내려졌고, 바람에 창문 흔들리는 (혹은, 바람이 창문을 깨부술 듯 때리는) 소리에 새벽 4시 반에 눈이 떠져 뒤척이다 결국엔 아침 10시에 일어났다. 하루 종일 바람 부는 소리에 기가 눌려 집에만 있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저녁에는 군것질 거리라도 사 와야겠다 싶어 잠깐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네. 날씨가 이렇게 (쌀쌀도 아니고) 추워졌다니.

  2. 1차 백신과는 달리 2차 백신 후에는 주사 맞은 팔뚝이 약간 욱신 거리는 거 말고는 전혀 다른 증상이 없었다. 주사를 맞은 다음 날, 날씨가 매우 화창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다른 증상이 있지 않을까 싶어 집에 있었다. 제주를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런 맑은 날씨에 집에 있기 억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는 올 한 해 질리도록 했는데도 왜 아직도 질리지 않을까 궁금. 왜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는 매번 이렇게 달콤한지.

    게다가, 제주에서 이렇게 빈둥댈 때마다 느끼는 묘한 쾌감이 있다. 3박 4일 또는 일주일 이렇게 기간을 정해 둔 여행이나 어디 둘러볼 여유조차 없는 출장으로 '빈둥'댈 시간이 너무 아까웠던 곳에서 철저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누워있어도 되는 기분은 정말 묘하다. 

  3. 침대에서는 주로 넷플릭스 드라마 정주행을 한다. 그렇게 해서 본 드라마가 꽤 되는데 그중 영국 드라마 'The Serpent'는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오싹. 그동안 안전하고 무사히 여행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신 신께 감사기도를 드리게 되는 드라마다. 동시에 앞으로 남이 준 음료수는 마시지 말자, 내 마실 거리는 내가 챙기자, 라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추천, 매우 추천! 

    이 드라마는 8회인가 9회 짜리인데, 하루 종일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면 하루만에 정주행 할 수 있다. 재미가 있어도 중간중간 조금 느슨해지거나 혹은 너무 길면 중간에 쉬었다가 딴 짓하게 하는 (또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드라마도 많은데 The Serpent는 그럴 틈을 안 준다. 이게 실화라니, 더 솔깃해진다. 

    https://www.imdb.com/title/tt7985576/?ref_=fn_al_tt_1 


  4. 내가 지내는 숙소 마당에 감나무가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감을 잔뜩 주셨는데, 이맘때가 감이 익는 계절이라는 것도 몰랐다. 자연이 사시사철 너그럽게 베푸는 식재료에 대한 지식이 참 부족하다. 읽을 만한 책이 있을지 찾아봐야겠다. 엄마에게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막상 엄마와 보낸 시간도 많지 않아서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니 아쉬운 게 많다. 엄마는 올 가을에 메주를 띄우고 고추장도 담그신다고 했는데... 그때는 꼭 집에 가서 배워보고 싶은데 갑자기 할 일이 많이 생겨서 시간이 맞으려나 모르겠다.

    쉬어도, 쉬어도 아쉽고 모자라다. 놀아도, 놀아도 더 놀고 싶고. 제주도 마찬가지다. 올레길을 거의 다 걸었는데도 지도를 보면 아직도 못 가본 곳이 너무 많다. 360여 개가 넘는 오름도 그렇고.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또 그 마음으로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을 기회를 찾겠지 싶어서 아쉬움을 달래 본다. 15일 남았다. 미리미리 작별 인사를 해두는 타입이라, 나는 오늘부터 인사를 시작한다. 그래야 마지막 날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으니.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에는 감나무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내일 또 볼 거지만, 미리 해두는 거야. 10월 31일 체크아웃할 때 너를 깜박 잊을 수 있으니까. 감도 잘 먹었고, 있는 듯 없는 듯 마당을 항상 지켜줘서 고맙다. 길 건너편 편의점에게도, 신호등에게도 인사를 해야지. 이런 평범한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제일 그리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