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1] 1년 놀아도 안 죽어-띄엄띄엄 제주걷기 12 : 제주에서 버스타기

2021. 10. 12. 08:59별 일 없이 산다

올레 16길 - 수산봉 내려오는 길 

 

  1.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이렇게 걷기 좋을 수 없다. 3월, 4월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누렁이가 된 하얀 바람막이가, 그동안도 역할을 잘 해왔지만, 요즘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물론 빛을 발한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변색이 되었다. 의류 쓰레기 안 만들기 위해 오래오래 입으려고 일부러 좋은 걸로 산다, 해서 산 건데 딱 1년용이 되어 버렸다. 검색을 해보니 하얀 바람막이는 변색이 잘 되는가 보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는 하얀색으로는 바람막이 안 살 것 같다.  


  2. 제주 날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늘 두 가지 이상 출처가 다른 기상예보를 매일 확인하는데도 다음 날 일기예보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서 강수확률이 50% 이하면 그냥 길 걷기에 나선다. 비가 안 올 확률이 더 높으니. 물론 가랑비는 대충 맞고, 소나기는 시간도 많으니 잠시 피해있으면 되겠지 싶은 마음도 있지만, 비가 오기 직전이나 비가 올락말락한 날씨에 걷는 재미가 상당하다. 비 내리기 직전의 흙과 나무에서 나는 향기는 뭘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강수확률까지 30% 였던 오늘, 올레 16길 위의 수산봉을 걷다가 그 싱그러운 당황스러움을 만나서 어쩔 줄 몰랐다. 수산봉 정상을 두어 바퀴 더 돌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더 돌다가 올 걸 그랬나, 지금도 아쉽다. 


  3. 제주분들께 물어보면 제주 대중교통에 대한 불만이 많으신데, 나는 만족도가 매우 높다. 지선 버스 시간 맞추기는 쉽지 않지만, 차 없는 관광객으로서 이만큼 편의를 누릴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 텅텅 빈 지선버스를 만날 때마다 세금 낭비라고 하시는 도민들의 마음도 이해 가지만, 어쩌다가 (종종과 가끔 사이 정도?) 아주 힘들게 버스에 오르시지만 왠지 한참 버스를 기다리셨다가 타시는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뵐 때마다 공공서비스의 역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된다. 

    암튼, 제주 버스를 이제 한 7개월 타다보니 요령이 많이 생겼다. 우선 지도 앱으로는 불충분하다. 지도 앱에는 자주 다니는 버스들만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꼭 미리 길을 나서기 전에 여기를 확인해야 한다.
    ==> 제주버스정보 시스템 http://bus.jeju.go.kr/  여기서 미리 급행이건 간선, 지선이건 모든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갈아 탈 경우 시간을 넉넉히 계획하고 출발하면 어려움 없이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지도앱도 봐야 하는데, 가야 하는 길만 보지 말고, 넓게 넓게 지도를 펼쳐야 한다. 녹색 지선 버스밖에 없는 길이다, 하면 혹시 간선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다른 루트는 없는지, 근처에 갈아타는 버스가 많은 정류장은 없는지 평소 쌓아 두었던 정보를 활용해서 다른 대안도 찾아봐야 한다. '평소 쌓아두었던 정보'라는 말은 우연히 겪은 경험들, 실패든 성공이든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경험들이기 때문에, 처음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제주 버스정보 시스템을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제주도 진짜 거주자들은 버스를 거의 안 타고 다니기 때문에 물어봐도 잘 모른다. 그들에게는 맛집 정보를 기대하고, 버스 정보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발품 팔아야 한다.

    특히, 자주 다니는 간선버스조차 시간대별로 건너뛰는 정류장이 있다는 것!! 예를 들면 내가 무진장 자주 타는 282번은 서귀포 방향에서 고성2리나 유수암단지에 가려면 번거롭더라도 기사님께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한다. '고성2리에 서나요?' 

    그리고 버스를 잘 못 탔다고 해서 바로 다음 정류장에 내리지 말고, 잽싸게 지도앱 확인을 하거나 기사님께 물어서 환승버스가 제일 많은 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내려 버리면, 지구 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제주에는 외진 곳이 생각 그 이상으로 훨씬 많다. 


  4. 이제 서서히 짐을 싸야 한다. 옷은 세탁하는 동안 번갈아 입을 것들로만 최소한 챙겨 왔기 땜문에 별로 짐이 없으나 책이 많다. 게다가 르몽드 세계사 두 권은 정말 무겁다. 미리 택배로 부칠까 싶어서 읽는 책, 안 읽는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욕심만 많아서 너무 많이 가져왔다.

    무엇보다 지상 최대 최후의 할인인듯 다그쳐서 충동적으로 구입했으나, 내가 산 이후로도 계속 가격 할인 중인 <가벼운 학습지>!! 저거 52주 분량을 모두 가져다 놔서... 진짜 짐이 되어버렸다. 내게 없는 것은 학습지가 아니라 '의지' 였는데, 그 의지는 매일 10분씩만 하면 된다고 꼬드겨도 발동되지 않음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다시 한번 더 체감하게 된 정도랄까. 매일 10분만 하면 된다는 근력 운동도 하기가 힘든데...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가벼운 학습지> 정도로는 의지가 막 불끈불끈 솟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암튼 집에 돌아갈 즈음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요즘은 더 부지런히 걷고 있다. 걷기에 완벽한 계절이라 더욱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