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8] 제주 올레 13길 - 용수리에서 저지오름

2021. 9. 30. 21:58한 걸음 한 걸음

추석을 부모님 댁에서 보내고 다시 제주로 돌아온 뒤 처음 걷는 길이다. 그 전 주는 9월 12일 올레 14-1길을 마지막으로 거의 일주일 내내 비가 와서 집에 갇혀 있었고. 그러니, 정말이지 내가 걷고 싶다고 해서 걸을 수 있는 게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용수리까지는 숙소에서 바로 가는 버스 202번이 있다. 그리고, 용수리 정류장 까지는 비 때문에 왔다가 다시 되돌아 간 적도 몇 번 있어서, 다시 한번 더, 내가 걷고 싶다고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하루가 무탈하면 그것이 최고의 축복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용수리에서 용수포구까지는 전에 걸었었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에서 바로 용수 저수지 방향으로 걸었다. 

 

 

순례자의 교회가 나타난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정말 오래 되었다.

도도마에서는 띄엄띄엄이나마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2018년부터는 주말에 출장이 잡힌 경우도 많았고, 영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도 없었다.

 

작년은 새로운 국가에 파견되자마자 코로나가 터져서 아예 교회를 찾지 못했고, 

한국에서 보내는 올 한 해도, 서울에서 살지 않으니 내가 다녔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기회가 없었다. 

기도는 늘 하지만,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신앙생활을 지켜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온라인으로 정규학습을 해야 하는 초중고등학생들이 걱정이 된다. 

그렇잖아도 수업시간에 집중이 어려운데, 온라인 학습을 얼마나 집중력 있게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안쓰럽고 대견하고 걱정된다. 

암튼 순례자의 교회를 지나면서 딴생각에 잠시 빠져봤었고, 

 

계속 걷다 보면 용수 저수지가 나온다. 

 

 

 

1957년에 제방을 쌓아 조성한 저수지로 인근 논에 물을 대는 용도로 유용하게 활용되어 왔단다.

1957년이라니, 오래도 되었네.

 

 

화장실 간판이 예뻐서 한 번 찍어보고, 

 

 

이런 길에 화살표가 없으면 불안하다. 

왠지 길 생김새가 오른쪽이 올레길일 것 같아서

별생각 없이 오른쪽으로 갔다가 리본이 없어서 다시 되돌아 나왔다.

리본은 왼쪽 길에 달려 있었다.

이런 식으로 길을 잃는다.

 

 

고즈넉한 길이 마음에 든다.

해가 뜨거워 잠시 서서 선크림을 다시 바르는데,

하얀색 여름용 바람막이 팔 소매 부분 변색된 것이 신경 쓰인다. 

올해 처음 입은 건데, 땀 때문에 변색이 된 건가, 색이 누렇게 변했다 ㅠㅠ

매일매일 빨았는데 왜 이럴까, 투덜투덜 대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누런 팔뚝 소매를 불평하기에는 길이 너무 아름답다. 

 

 

 

고목숲길이 끝나면 대로변을 조금 걷는다. 

하동 사거리를 앞에 두고 왼편을 보면 고사리숲 들어서는 입구 안내판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정신 놓고 그냥 걸어도 다시 올레 13길 위에 서기는 하는데

고사리숲은 놓치게 된다. 

 

 

 

길 양 옆으로 고사리가 무성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고사리 때문이 아니어도 아름다운 길이다. 

평평한 바위를 만나서 잠시 다리를 쉬게 하고 다시 걸었다.

다리 아파서  쉬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숲이 좋아서 시간을 보냈다.

이때만 해도 내 다리는 전혀 문제없었지. 

 

 

 

낙천의자마을의 상징 

호수에 떠(?)있는 거대 의자.

올레 13길 도착지점 도장도 이 낙천의자 모양을 하고 있다.

 

 

중간 도장을 찍고.

 

 

잣길의 유래를 찬찬히 읽어보고,

 

 

이렇게 예쁜 길을 걷고 잠시 행복해하다가, 

 

또 눈에 들어온 변색 바람막이,

허리에 둘러 맨 하얀 바람막이 누런 소매가 보기 싫어서 한편에 서서 가방에 쑤셔 넣는다.

이 바람막이, 그 가파도 바람막이 맞다. 

속주머니 인척 하지만 사실상 뚫려있어서 신분증 분실하게 만들었던. 

바람막이 생각은 이제 그만해야지.

 

암튼 올레 13길은 곶자왈처럼 무성하고 울창한 숲은 아니지만

편안하고 담백하다. 

힘이 드는 걸음이 아니라 어슬렁어슬렁 놀멍쉬멍 걷는 길.

저지오름 분화구 밑까지 내려가는 계단을 걷기 전까지는 그랬다 --;;

 

 

저곳을 돌아서면 뭐가 나올까 궁금해지는 길들이 계속 이어진다.

길이 이렇게 예쁠 수 있도록 관리를 하시는 분들의 손길이 감사하다. 

복 받으시기를!!

 

 

 

잣길을 다 걷고 귤 농장을 조금 통과하다 보면 오르막 길에 올레 리본이 보인다. 

숨이 차겠군.

 

 

하지만 계속 평지로 길이 이어진다.

숨 헐떡이지 않고 여전히 평온하게 길을 걷는다. 

 

올레 13길도 나눠서 걸으려고 했는데,

왠지 오늘 한 번에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뒷동산 아리랑길에 들어서면 저렇게 땅에 늘어지게 풍성히 열매를 맺은 나무들을 지나야 한다. 

고양이가 생선가게 지나는 느낌이랄까. 

엄청난 유혹을 이겨내며 걷는, 정신 훈련의 길이다. 

이렇게 바닥에 늘어지게 열매를 맺고도 나무들이 방치된 농장을 여럿 지난다. 

 

 

 

귤나무의 유혹을 이기고 나면

맞절을 하고 있는 듯한 나무들이 저렇게 예쁜 지붕을 만든 길을 기분 좋게 통과하고

드디어 저지오름!

 

저지오름 자체를 오르는 길은 어렵지 않다. 

비교적 완만한 편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저지오름 등산로가 올레 8길 베릿내오름처럼...

혹시 정신 안 차리고 그냥 걷다 보면 

몇 바퀴고 그냥 돌다 헤어 나오지 못하는 뫼비우스 띠 같은 루트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베릿내 오름 뺑뺑이 - https://matika.tistory.com/76)

 

 

이런 장면들 - 하도 빽빽해서 어둑어둑한 숲길을 걷다가 

아, 저기가 정상인가 보다 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치 터널의 끝에 다가서는 듯한 이런 순간들 

 

이런 순간들이 참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저지오름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도 멋지겠지만, 

이런 기억들이 미래의 어느 순간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고,

무척 그리울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둔다. 

 

 

저지오름 전망대 

전망대에서 물도 마시고 한참 쉬었다 내려온다.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중산간의 풍경이 이제는 익숙해서 편안하고

익숙하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신기하고 제주는 정말 보물이다, 싶고...

이런 생각은 이제 질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질리지 않는다.

진심으로 제주는 우리나라의 보물이고 막 자랑스럽고 그런 감흥에 취해 있었을 때, 

다리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5km는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13길을 하루만에 거의 다 완주한 셈이기도 하고. 

 

 

 

문제는 분화구!! 

 

 

저지오름 분화구는 기원전 25~20만 년 전에 형성된 원형의 분화구 형태로

둘레 800m, 직경 255m, 깊이 62m 규모라고 한다. 

과거 수십 년 전에는 분화구 밑에서 마을 사람들이 유채, 보리, 감자 등과 같은 작물을 재배했다고.

 

이 분화구가 궁금해서 나는 분화구 계단을 내려가 봤다. 

내려가면서, 엇,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다시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내려왔을 때부터 후회는 시작되었고 

다리를 통제하기가 힘들어졌다.

 

올 한 해 이만큼 걸었는데도 이렇게 다리가 약해서야...

어떻게 한라산 성판악 계단을 오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거 예약을 미리 취소해야 하는가 싶다 ㅠㅠ

 

다리가 흔들리다 보니 사진도 흔들려서 계단 사진은 많이 없지만

계단이 어마 무시하다.

 

올레 13길은 나 같은 사람도 하루 만에 완주가 가능했지만, 

올레길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분화구 구경하려 내려갔다가 

다녀온 지 이틀째 되는 지금 이 시점까지도 종아리가 당긴다. 

 

 

그래도 걸어 나와야지. 분화구에서 살 수는 없으니. 

 

저지오름에서 내려오는 길은 다행히 수월하다. 

내려가는 길 표시가 매우 반가웠고.

 

 

저렇게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집들도 지나고, 

 

조금 더 내려오면 저지예술정보화마을 안내센터 나오고

도착점 도장을 찍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은 버스 시간만 잘 맞추면 관광지 순환버스 820번 버스를 타고 동광환승정류장까지 올 수 있다.

동광환승정류장에서는 제주 여기저기 다니는 버스가 많다. 

 


오랜만에 올레길 당일 완주해서 매우 뿌듯했으나

저지오름 분화구의 후유증은 오래갔다. 

 

저지오름 분화구 몇 배 이상의 난이도를 지닌 성판악 계단을 곧 올라야 하니,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한다. 

너무 충동적으로 예약을 했을까?

취소를 해야 하나, 등반 전날까지 망설일 것 같다. 

 

그래도 올라야겠지. 

과연 어떻게 될까,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그나저나 변색된 하얀 바람막이는 어떻게 다시 원색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