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30. 20:07ㆍ한 걸음 한 걸음
오랜만에 당일 여행기를 써 본다. 9월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 좀 특별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해서 일찍 돌아올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올레 26길 425km 완주를 살짝 앞두고, 요즘 나의 고민은 18-1길, 추자도이다. 선박 정기 점검 기간이라 9/27~10/7일인가 10/6일까지는 배편도 없다. 10/7일 이후 1박 2일로 가보려고 하는데, 여기는 대체 어떤 이유로 제주도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먼 곳이다. 추자도는 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큰 일이다.
아무튼 그동안은 제주에서 있고 싶은 만큼 실컷 지내보자, 라는 느긋한 마음이었는데 11월부터는 일정이 생겨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31일 까지가 되었다. 아직도 다녀보지 못한 곳이 많은데 어쩌나, 하는 행복한 조바심으로 요즘은 제주도 구경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7월이나 8월의 나였다면, 엊그제 올레 13길 저지오름 분화구 계단 왔다 갔다 한 덕분에 뻐근해진 종아리를 핑계로 오늘은 집에서 뒹굴뒹굴했을 텐데 말이다. (저지오름을 오르는 것은 전혀 부담되지 않았는데, 분화구 계단 왕복이 힘들었다 ㅠㅠ)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섰다. 김녕서포구에서 시작하는 올레 20길을 가려면 거의 2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 서귀포 색달동에서 긴 방향으로 거의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서귀포 터미널에서 급행 101번을 타고 김녕 환승정류장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올레 20길 시작점이자 19길의 시작이 나온다. 나는 이 시작점이 바로 등 뒤에 있었는데 그걸 놓치고 왠지 길 따라 걸어야 한다는 직진 충동에 19길을 역방향으로 10분 넘게 걸었다가 왜 도장이 안 나타나지? 두리번거리는 와중에 알아차렸다. 길을 잘 찾아야 한다는 강박은 버리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는 길을 잘 놓친다는 이유로 나를 꾸중하지는 않기로 한다.
김녕 환승정류장에서 내려 김녕서포구로 걸어가는 길은
지붕이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에 걸쳐있다.
오늘은 날이 흐리다.
흐리면 흐린대로 또 분위기가 있다.
해가 뜨겁지 않아서 걷기 수월한 점도 좋고.
김녕포구를 따라서 걷는 작은 마을은 골목이 매력적이었다.
구비구비 미로처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친절하게 길없음 안내를 해주기도 한다.
이 동네는 금속벽화마을이라고 하는데, 벽화가 진짜 인상적이긴 하다.
특히 아래에 나오는 해파리 금속 벽화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살짝 징그럽기도 하면서 묘하면서...
가랑비가 내렸다 그쳤다 했던 날씨라 사방이 다 촉촉하다.
이 동네 골목길은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하게 만들어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마구 헤맬 수도 없다.
저리 친절하게 '길 없음'을 푯말로 걸어둘 정도면
이 동네 골목길의 매력에 빠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거지.
오죽 많았으면 저리 길없다, 출력까지 해서 걸어 두셨을까.
한편으로는 저렇게 길이 없다는 안내를 받는 건 왠지 기분이 좋다.
예전 같으면, 그래도 한 번 보고 올게요, 했을 텐데
요즘은 그저 고맙다. 네네, 그리로 안 갈게요.
이게 아까 위에서 말했던 해파리 금속 벽화
색깔도 그렇고 감촉도 그렇고....
이 담벼락 맞은편 집 가까이 붙어서 사진을 찍는데
늦은 아침을 준비하시는 소리가 집 안에서 들려온다.
모녀가 계시는가 본데, 마치 우리 엄마와 나처럼 사소한 일로 큰(?)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해파리들이 창문 넘어, 담 넘어 들려오는 모녀의 대화에 웃고 있는 것 같다.
이 동네에는 아기자기한 카페나 숙소들이 많다.
여기는 카페인지 숙소인지는 모르겠지만 담벼락이 굉장히 예뻤다.
다음에 제주 여행을 짧게 오게 된다면, 교통이 불편하고 마트가 멀어도 이런 숙소에서 지내볼까 한다.
취향과 선택의 문제겠지만,
솔직히 자연 풍경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숙소는 차 없이 '생활'을 하기 불편하다.
김녕 해안은 밀물일 때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일 때 드러나는 해안선 사이의 조간대 지역이 많다고 한다.
이 일대는 해수면이 낮았던 시기에 점성이 낮은 용암이 흐르면서 평탄한 용암대지를 형성했는데,
용암의 표면에는 밧줄 구조나 치약 구조와 같이 용암이 남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올레길도 누군가가 표면을 채칼로 긁어놓은 것 같은 평평한 용암 대지위에 조성된 구역이 많았다.
정신 놓고 발 헛디뎌 넘어졌다가는 부딪힌 곳은 작살 날 것 같은 위험한 지역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걸어야 한다.
왠지 비장해진다.
I dive for a living.
조만간 다시 일터로 복귀해야 하는 내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시는 것 같다.
그래, 금수저가 아니고서는 놀기만 하고는 못 살지.
일 해야지.
외세 침략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 작은 성이 있어서 성세기 해변이라 불린다고 한다.
올레 20길은 바람의 길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풍력발전기가 해안가를 따라 쭈욱 세워져 있다.
나름 해안과 조화를 이룬다.
태역은 잔디를 일컫는 제주도 말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 잔디가 많아 올레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그쳤다 한다.
그냥 모자 쓰고 걸을만하다가도 조금 거세지기도 하고.
구름이 가득한 하늘 덕분에 올레길은 환하다 못해 눈 부셨던 다른 해안길과는 또 다른 분위기이다.
왠지 좀 더 차분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걷기에 나쁘지 않은 정도로 비가 적당히 와 주었다.
환해장성부터 성세기 태역길까지 걷는 올레길은 정말 흥미롭다.
좀 전에 위에서 말했던 그 밧줄과 치약 구조의 용암 흔적이 남은 바위 위를 걷는 길이 많다.
가랑비로 억새와 잔디와 잡초와 그 외 이름을 알지 못하는 풀들이 싱그럽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루하지가 않다.
그러다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생선 비린내.
아니, 비린내가 나지 않는 포구인데.... 어디서 누가 회를 뜨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두리번거리다가 해안에 버려진(?) 생선들을 발견
버려진 것인지 아니면 바다에 살다가 밀물에 살 길을 못 찾고 죽은 것인지
한 두 마리가 아닌데, 이거 뭔가 자연의 재앙이 올 것이라는 징조인가?
그러기에는 좀 숫자가 부족해 보이고...
무슨 일일까?
길이 이렇게 되어 있는 곳에서 만나는 간세 표지는 세상 반갑다.
여기서부터 해안을 조금 벗어나 마을길을 조금 걷다 보면 월정리 바다가 나타난다.
이 집 개 두 마리는 세상 편하다.
내가 한 참을 서서 지켜봤는데 상관치 않고 편히 쉰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에 나올 일은 절대 없을, 심성이 매우 느긋한 개인가 보다.
이 동네는 정말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다.
월정리 카페 동네야 원래부터 유명하긴 했지만 점점 더 주택가 안으로도 확대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 때문인지 문 닫은 곳도 몇 군데 눈에 띄긴 하지만
다들 영업이 잘 되셔야 할 텐데, 이렇게 많이 들어서도 괜찮은가 싶네.
월정리 해변 - 파도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서퍼들이 제법 많다.
사실 서퍼 말고는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봐야지.
이때부터 가랑비와 소나기 사이 경계가 미묘한 비가 내리기 시작.
우산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바람은 세지 않아서 우산 쓰고 걸을 만했다.
비는 잠시 내리다 그치고, 그러다 다시 내리고, 또 그치고...
비 덕분에 우중충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밭담과 화려한 꽃과 색칠을 한 소라 껍데기가 더 선명하다.
드디어 중간 도장 찍는 지점, 행원포구 광해군 기착비에 도착!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기로 한다.
가랑비에 너무 젖어서 살짝 몸이 추운 것이 불안하다.
10월 4일 한라산 등반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한다.
한라산 등반은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10월 한 달 밖에 안 남았다고 하니 왠지 모를 충동에 이끌려 예약을 해버렸다.
사실은, 매일 800명만 탐방할 수 있는데
내가 예약하려던 순간, 딱 마지막으로 한 자리만 남은 것이 보였다.
799는 이미 꽉 찼고, 딱 하나 남은 자리.
쇼핑몰의 뻔한 속임수 같은, 딱 하나 남은 기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나 보고 오라고 하는 것 같아서 냉큼 예약은 했으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ㅠㅠ
처음 한라산 등반했던 십수 년 전, 성판악 등산로 계단의 저주에서 나 혼자 낙오할 뻔했었다.
그때는 옆에서 잔소리하는 사람들이라도 있었는데,
이번엔 나 혼자 올라야 하고,
게다가 나는 최근 길 걷는 중에는 나를 혼내지 않기로 결심을 했는데...
잘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한라산 등반을 위해서 연습용으로 올레 20길을 걸었다는 것은 아니다.
가랑비에도 걸음을 서두르지 않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소중히 감사하며 걸었고,
다 못 걸은 아쉬운 마음은 다음을 기약하며,
10월 중 남은 올레 20길 - 행원포구에서 해녀박물관까지 마저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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