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31. 05:49ㆍ일하다가 드는 생각
육성재의 <할말하않>을 내가 어케 알고 막 찾아서 그리고 집중해서 들었을 리가 절대 없잖아?
음악을 찾아 듣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모르겠고,
일하면서 집중하기 위해 배경음악으로 듣는 음악들은 늘 정해져 있고,
그러다가 오늘 오후는 토요일이지만 정말 바빴는데,
오죽하면 구글에 '할말하않'을 검색하다가 이 노래를 발견... 듣다 보니 계속 듣게 되네.
2020년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를 이 노래와 함께 보냈다.
'할말하않' - 이런 줄임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냉면집에 가도 꼭 '비빔냉면', '물냉면'이라고 말하고, '김떡순'도 싫다. 김밥, 떡볶이, 순대 - 이렇게 다 풀어서 말하는 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명사들인가. 물론 왜 줄임 표현이 트렌드인지 그 이유는 이해가 가지만, 정말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래된 사람 티를 낸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도 오늘 오후, '할말하않'이라는 표현에 꽂혔고, 몇 번이고 되뇌여보았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할말하않, 할말하않, 할말하않... 그러다 보니, 진짜 '할말하않'이라는 표현은 줄임 자체에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을 거야,라고 길게 다 말할 필요도 없다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는 더 짧은 표현으로 만들어도 무방할 정도로. 게다가 할말하않, 말하다 보면 '않'에서 속으로 삭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소리가 난다. '할말하않' 반복하다 보면 위로까지 받는 느낌이다. 암튼 나는 오늘 '할말하않'에 꽂혀, 심지어 구글 검색까지 했고, 그러다가 평생 관심 없었을 육성재의 노래까지 오후 내내 계속 듣게 된 거지. (듣다보니 목소리가 좋더라구. 그의 다른 노래까지 듣게 되었고... 또 그렇게 잠시 삼천포로 빠짐)
'할말하않' 검색을 유발시킨 사람은, 손발을 맞춰보기로 결심한 현지 직원 후보였다. 그가 이 글을 한국어로 읽을 일은 없겠지만, 최대한 인신공격을 삼가면서 조심히 써보도록 하겠다.
현재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공식 공고를 낼 수 없어서 추천으로 몇 명 소개를 받았고, 그중에 한 명과 리서치를 같이 하기로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재택으로 일을 두 달 했었고, 드디어 지난주에 정부 업무도 재개되고 어느 정도는 안전하겠다는 판단으로 나도 그를 사무실로 불러서 지난 두 달 업무에 대한 리뷰 미팅을 했다. 두 달 동안 의사소통하면서 느꼈던 것은 '할말하않' 하겠다. 존중하고 싶고, 그리고 그의 경험 수준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주 미팅에서, 그가 자랑스럽게 가져온 보고서를 리뷰하다 보니 정말 뒷 목을 잡고 싶어 졌다.
아랍어를 못 읽는 상사에게 아랍어로 된 웹사이트의 이미지를 그대로 캡춰해서 넣어오지를 않나, 보고서 한 장에 이미지 하나 달랑 넣어두는 방식으로 보고서 분량을 채우지 않나 (보고서 분량에 제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이름들만 쭈욱 나열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데도 무려 3장을 사업지역의 학교 이름들로 꽉꽉 채우고 (물론 아랍어), 보고서 주제가 3가지인데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주제 간 정보의 깊이와 질이 너무 차이가 나는 등 형식적인 면에서도 부족함이 많았고, 정보의 질만 보더라도, 이 나라를 잘 모르는 내가 구글로 검색해도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리서치의 목적이 파악이 되지 않았다는게 여실히 드러나는 결과물이었다.
물론 그래도 좋다. 수퍼바이저로서 나는 평가를 나누고 다음번에 잘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 그리고, 비교적 이렇게 슈퍼비전을 줄 때 인내심이 많은 편이라는 얘기도 들었고 (물론 다른 이슈들을 다루는 내 평소 성격에 비해 ㅜㅜ), 다음번 일을 잘할 수 있게 피드백을 주는 일이 재미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책없이 자신감이 높으면 대책이 없다. 황당한 동료들을 여럿 겪어왔지만, 그는 Top 3에 속할 정도로 놀라웠다.
그는 리서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꽂힌 프로젝트를 설명하는데 주력했고 (두 달 동안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잘 전달이 안된 것 같다), 쉴 틈 없이 amazing, fantasic을 외치며 자신의 보고서를 칭찬했다. 그러면서 100장이 넘는 분량을 채운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 그중 40장이 아랍어로 된 웹사이트 캡처), 가장 당황했던 것은, 나에게도 자신의 평가에 동의해달라고 해왔다는 점이다. 다음 주제 조사도 잘 할 수 있다고 자신감에 넘쳐서.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업무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업무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업무적으로만 들리게 전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의견을 주어도 이해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고, 200% 이해해서 훌륭한 결과물로 변형시켜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다. 조언이나 충고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상대에게 닿기 어려운 일이다.
'보고서를 더 꼼꼼히 읽어보고 이메일로 피드백 보내줄게. 미팅은 여기서 마치자. 수고했어'
그를 돌려보내고, 주말인 금-토일 동안 보고서를 읽으면서 뒷 목 여러 번 잡았다. 피드백 요약하는데 3장이 나왔다. 줄여서 2장을 만들었고, 그래도 긴 것 같고 또 못알아 들을 것 같아서 그냥 메일 본문에다가 더 요약해서 한 장 분량으로 썼다. 줄이고 다시 쓰고, 이 표현이 혹시 맘 상할까 봐 다시 고쳐보고, 친절한 버전으로 썼다가, 이래서는 이 놈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못 치료한다, 싶어 냉정하게 말했다가, 아직 내 팀원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다시 불필요한 형용사들을 다 지우고.... 근 1년 사이에 이렇게 까지 피드백을 전달하는데 힘을 들인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잠시 인터넷 서핑 삼천포로 빠져서 육성재 노래를 발견하게 된거다. 할말하않 검색도 하고, 할말하않과 관련된 엄청 웃긴 이모티콘들 보면서 혼자 낄낄 거리며 기분 전환을 했고,
그리고 정신을 다시 수습하여, 그에게 보내려던 임시저장함의 메일을 다 지우고,
다시 새로 메일 쓰기를 했다.
'수고했어. 도움이 되는 reference들도 있었다.
다만 분량이 많아서 전체 공유하기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으니
리서치 목적별로 각 1 page 씩 Key point 중심으로 줄인 요약버전을 하나 만들어 볼래?'
얼마만큼 이해하고 결과물을 만들어올지는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이 친구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가 굳이 현실화시켜줄 필요가 없는 관계이니, 딱 이 정도만. 정 안되면 같이 일 안 하면 되는 거고.
사람이 제일 어렵다. 기대치를 정확하게 하고 (주로 하향조정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음), 그에 맞게 존중하고, 불필요하게 상처 주지 않고, 내 생각 있는 대로 드러내지 않고,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고, 되도록이면 많이 격려해주고... 슈퍼비전을 준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나를 다스리는 훈련이다. 이 정도만 하면 되는 관계다, 라고 선을 긋는 일은 꼭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외로운 일이기도 하다. 더 욕심내지 않고, 만족하기.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으로 나는 오늘 조금 더 성장했을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내 나이쯤 되면 이런 생각들 할 필요도 없이, 어떠한 상황이라도 척척 다 해결할 내공이 쌓이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이 종이짝같이 얄팍한 멘탈로 누구를 평가하고 지적질을 한단 말인지. 아.... 생각이 이쯤 이르고 보니, '할말하않'은 결국 나에게 했었어야 할 말 같구나. 나야말로 누군가에게는 '할말하않'이겠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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