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4] 1년 놀아도 안 죽어-띄엄띄엄 제주걷기 17 : 이사짐 정리, 냉장고 채우기는 쉬운데 비우기가 쉽지 않다
2021. 10. 30. 23:34ㆍ별 일 없이 산다
- 다시 제주로 돌아오는 길, 엄마가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셨다. 엄마는 내가 하는 행동 중에서 제일 보기 싫은 것이 바느질하는 것과 짐 무겁게 하고 어디론가 떠나는 일이라고 하신다. 바느질은 나이 들어 시간 많을 때 실컷 할 수 있을 텐데 왜 할 일 많다며 바느질이냐, 그리고 제발 무겁게 다니지 말고 짐은 미리미리 택배로 부치거나 가볍게 다니라고 하신다.
- 바느질은 스트레스를 풀고 생각을 비우는 매우 소중한 취미활동이고, 어디론가 떠나는 일은, 어쩌다보니 직업이 되었다. 특히 부모님이 지방으로 내려가신 이후에는 만남과 헤어지는 인사가 조금 특별해지기 시작했고, 종종 반복해야 하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국내에서 떨어져 지내는 것과 해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큰 차이이다. 어느덧 1년의 휴직 기간이 다 지나고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 되다 보니 엄마가 심난해하시는 게 느껴진다. 11월까지도 제주에 있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남은 시간은 엄마 가까이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그렇게 제주에서의 생활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따져보니 7개월을 꽉 채웠다. 처음에는 한 달만 있으려고 했었는데,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이 되었다가... 7개월이 되었다. 최대한 가볍게 산다고 했는데도 집에서 가져온 책이랑 바느질 재료 등 짐이 많이 늘었다. 이사 짐 정리를 시작했고, 택배로 보낼 수 있는 것들도 미리 정리해서 보낼 참이다.
이삿짐 정리 중 가장 큰 숙제는 냉장고 비우기이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품 목록을 만들어 이사하는 날까지 다 먹어치울 수 있을 것인지 가늠을 해봤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올레길 425km를 완주했는데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 살이 더 찌게 생겼다. 가볍게 산다고 해놓고서는 막상 냉장고 살림은 가볍지 못했다. 냉장고 비우기 일정이 있는데도 마트나 편의점에 가서 먹을 것을 또 사 왔고, 그리고 왠지 마지막 남은 시간 동안에는 제주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점들을 다시 찾고 싶어지는 이 묘한 심리.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절대로 절제력이 저절로 생기거나, 인간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 요즘은 베란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베란다에서 바다 쪽을 잘 살펴보면, 건물 사이사이 바다가 보이는 부분이 있다. 다만 잘 살펴 보아야 한다. 위에 있는 사진에도 바다가 걸려있는 부분이 있다. 올 한 해는 정말 원 없이 수평선을 보며 지냈네.
무탈한 일상 자체만으로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도 새삼 느낀다. 얼마 전 올레길을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팔을 다친 올레꾼을 만났다. 앰뷸런스를 부를 정도는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피를 흘리고 계셔서 택시라도 불러 타고 급히 병원에 가셔야 할 것 같은데 버스 정류장에 앉아 계신다. 궁금해서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 물어보니, 택시를 1시간째 부르고 있는데 오지 않는다고 한다. 콜택시를 부르려니 지역이 외지다며 콜비용을 너무 많이 불러서 그냥 버스를 기다린다고. 남의 고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동안 큰 사고 없이 길을 걷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사실 나도 위험한 순간이 몇 번 있긴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매일매일 예외 없이 지는 해이지만 무탈한 하루를 마감하며 만나는 그날그날의 석양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배운다. 뭔가 하루하루 가슴 벅찬 깨달음의 순간이 있긴 한데 말이지, 냉장고 살림을 현명하게 하는 절제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건 당최 내게는 생길 일이 없는 능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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