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7] 1년 놀아도 안 죽어-띄엄띄엄 제주걷기 10 :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훈련
2021. 10. 7. 11:11ㆍ별 일 없이 산다
- 아침 일찍 기상해서 올레 15길을 걸을 계획이었는데, 전화와 충전기 모두 방전이 되어 있어서 꼼짝을 못 하고 있다. 충전기는 완충되는데 3-4시간 걸리는 것 같던데... 전화는 금방 충전이 되겠지만 오늘은 그냥 마음을 비우고 오후에 출발할까 싶네. 충전지가 없으면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불편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걷는 길도 좋긴 하지만, 걸으면서 가끔 지구본연구소, 매불쇼, DW 다큐멘터리 듣는 재미도 엄청 쏠쏠하다. 암튼 어제 잠들기 전 충전을 안 해둔 덕분에 계획에 없던 아침 정신수양을 하고 있다.
- 내가 이 숙소에서 지내기 시작한 이후 몇 달 동안, 길 건너편 공터는 '임대' 현수막이 크게 붙어 있었다. 현수막에 구멍을 뚫어두는 센스를 잃은 주인 덕분에 미친 듯한 바람이 불 때마다 이 현수막은 엄청나게 바람소리를 확장시키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현수막이 사라지고 조용하다 싶더니 곧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현수막 바람소리 대신에 공사 소리가 계속 들린다. 멍청한 현수막이라고 볼 때마다 비웃었는데, 그 바람 소리가 그립다. 집에서 정신수양을 하는데 공사 소리가 거슬린다.
- 한라산 등반 후유증이 있었지만 어제는 올레 14길 나머지 숙제를 했다. 올레길에도 사람이 늘었다. 9시 40분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출발 도장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확실히 길을 걷기 수월한 계절이 왔나 보다. 저지마을에서 월령 포구까지 11km 정도 걸었는데 내 걷는 꼴을 뒤에서 보신 분들께 의도치 않게 상당한 즐거움을 드렸을 수도 있다. 시간도 보통 때보다 엄청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렇게 걸은 덕분에 오늘 다리는 훨씬 편해졌고, 이 여세를 몰아 내일이나 모레 추자도 1박 2일 여행을 예약하려고 한다. 마침 지금 이렇게 시간도 생겼고 하니, 숙소랑 배편을 후딱 알아봐야겠다.
- 사이버 대학에서 3학년으로 편입해서 시작한 공부가 있는데 10월 마지막 주가 시험이라 요즘 살짝 긴장해 있다.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도 있지만, 완전 흥미로운 과목도 있고. 그중 하나가 '한국어 기초문법'이라는 건데, 나는 요즘 이 과목을 공부하면 할수록, 한국어를 모국어로 해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 어려운 문법을 외국어로 배워야 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영어 불규칙 많다고 불평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아, 한국어 잘하는 테일러나 다니엘은 진짜 천재인가 보다. 어쩜 저렇게 한국어 불규칙을 다 지키면서 큰 문법적 오류 없이 유창하게 말을 잘하지. 정말 대단한 청년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말 문법을 배우면서 깨닫는 것도 많다. 지식적인 것을 포함해서 더 순수한 마음으로 학문을 대하게 된다고나 할까.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도 맞지만, 이건 나이가 들어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상대적으로 더) 늙은 자를 향한 격려가 아니라, 젊을 때는 소중함을 모를 수 있으니 늙어서 해도 된다는 장점을 강조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재미있다.
- 아주 가끔씩이지만 연락이 끊이지 않고 안부를 나누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예전 직장에서 인턴으로 만났던 관계다. 이제는 그도 새로운 직장에서 대리가 되어서 실무를 중추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는데, 최근 프로젝트 하나를 자기 때문에 죽 쒔다면서 자신의 멘탈 수습은 둘째치고 완전 틀어진 사업을 어떻게 다시 회복해야 할지 몰라서 직장을 관두고 싶다고 하소연을 해왔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괜찮다, 다 지나간다'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 다 지나가고 괜찮아지긴 하지만 말이다.
친구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졌고, 일 자체도 싫어졌다고 한다. 자신이 이렇게 무능할 수 있다는 것을 왜 이렇게 뒤늦게 깨달았는지, 자신의 상사가 이 일로 자신을 호되게 평가한 것도 일을 그만두고 싶은 이유란다. 이 사람 밑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거라고.
되돌아보면 그 친구와 비슷한 시기의 나도 맨 땅에 헤딩하던 시절이 있었다. 상사로부터 직접적으로 안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았지만, 비언어적 행동을 통해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고, 나 역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그때의 상황을 지금 되돌아보면,
첫째, 너무 자유로운 IT 기업에서 일하다가 경직된 대규모 조직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둘째, 내 책임과 역할이 명확했던 프로젝트 또는 Task 중심의 업무에 익숙해 있다가, 팀 중심으로 모두가 모두의 역할을 다 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역할도 분명치 않았던, 그리고 출근하면 계획에 없던 새로운 일이 떨어지는데 목적과 시간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업무가 아니라 땜빵식의 업무랄까...,
셋째, 나도 조직에 맞는 기술과 화법을 갖추지 못했다. 예를 들어, 텍스트 중심의 효율적인 파워포인트를 주로 만들어 왔는데 새로운 조직에서는 파워포인트의 모든 기능을 다 사용하여 화려하게 꾸며내는 기술이 필요했었고. (그런데 막 파워포인트 기술을 연마해서 PPT의 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
넷째, 가장 중요한 이유, 조직의 미션에 공감하지 못하고 막연히 회사가 좋아 보여서 입사한 경우.
지금 와서는 이렇게 객관적으로 상황 분석을 하면서 덜 자책할 멘탈이 생긴 것도 같지만, 그때의 나는 객관적이기보다는 나를 탓하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상처를 가지고 때로는 피 뚝뚝 흘리면서 어려운 시간을 통과했었던 것 같다. 내게 부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필요하다면 채워나가고 필요하지 않다면 그냥 무시해도 되는 것인데... 원더우먼이나 슈퍼맨은 될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 나를 그 당시 만났던 나의 상사나 동료들은 내가 제 밥벌이라도 할지 어쩜 지금도 한심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나를 기억할리도 없고, 그들은 근심 어린 따뜻한 걱정과 염려를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물론 지금 와서 하는 소리이고, 그때의 나는 달랐겠지.
친구에게는 본인의 성향을 잘 살펴보라고 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소위 좋은 회사이니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라고. 본인은 새로운 일을 하면서 스스로 동기 부여하며 성과를 잘 내거나 재미를 느끼는 사람인지, 아니면 안정된 곳이 주는 편안함에서 더 행복하게 잘 일하는 사람인지.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회사는 몇 번이고 옮겨도 (때려치워도,라고 말하고 싶지만) 괜찮다는 것을 실제 겪어 본 사람으로서 어렵겠지만 길게 보자.
'무능'에 대해서 잘 생각해봐라. 정말 네가 키우고 싶은, 꼭 키워야 하는 능력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무능해도 괜찮지 않을까. 모바일뱅킹 못하는 똑똑한 연예인들도 엄청 많다잖니.
그리고 무엇보다, 살다 보면 자기가 하는 일에 죽 쑤는 사람 많다.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미국 대통령들도 이념과 가치관을 떠나서 상식 밖의 실수 엄청 하드만.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살면서 방금 저지른 실수나 뼈 아프게 겪어야 했던 실패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더한 실수를 저지르거나 실패를 경험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할 뿐인 거지.
이런 말을 해주고 나면 내가 꼭 '꼰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찝찝하다. 즐거운 수다를 떠는 게 아니라면, 이런 얘기는 되도록 짧게. 친구는 여전히 시무룩한 목소리로 기운 내보겠다고 한다. 나처럼 한 1년 쉬고 싶다고 한다.
흠... 1년 쉰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쉰다'는 것이 간단해 보이긴 하지만, 준비 없이 맞는 '쉼'은 또 다른 무력감을 가져올 수 있다. 자신의 성향을 파악한 '쉼'의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런 얘기까지 할 상황은 아니어서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잘 쉬기 위해서는 정말 노력이 필요하다.
예전 블로그 정리를 하면서 여전히 일과 쉼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잃고 힘들어하던 2016년 5월의 기록을 하나 찾았다. 2020년의 나는 2016년보다 한 치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았고, 올 한 해를 이제 슬슬 정리하면서 2022년도의 나는 일과 쉼의 균형을 맞추는데 좀 나아질까 궁금해져 온다.
어제 다음 파견국을 협의하는 연락을 받고 나니 더 실감 난다. 과연 내년의 나는, 지긋지긋하게, 멍청할 정도로 일과 쉼 사이의 균형을 잡지 못하던 2016년, 또는 2020년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져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일과 삶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쉼표의 중요함을 절절히 일기장에 적어본다.
일과 삶에 좀 더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참 좋겠건만..."
2016.5.25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의 일기
https://blog.naver.com/ics2mtj/22071881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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