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6] 시골에서 숨어 못 산다
2021. 1. 26. 21:00ㆍ별 일 없이 산다
- 자가격리가 끝난 지 어느덧 1주일이 지났다. 시간이 정말 금세 지났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옥상에 올라가서도 듣고, 침대에 누워 창문 살짝 열어놓고도 듣고, 마당에서 아직 이름을 묻지 않은 우리 집 개와 눈 (eye) 싸움하면서도 듣는다. 그리고 낮잠을 두 어시간 잤다가 점심 겸 저녁으로 떡만둣국을 끓여 먹고, 커피 한잔 타서 아랫채로 내려와 인터넷 서핑도 하고 책도 보고 있다. 휴직 생활의 묘미다.
- 부모님은 개를 오래 못키우면서도 늘 개를 키운다. 물어보면 등산 데리고 갔는데 개가 스스로 도망갔다느니 다양한 변명만 듣게 된다. 요즘 같은 동물권 존중 시대에 큰 일 날 집이다. 1년에 한 번 집에 오는데 그때마다 개가 바뀌어 있었다. 문화와 보편적 생명권 사이의 충돌. 아무리 설명해도 절대 이해하실 수 없는 세대를 살아오셔서 일종의 포기 상태.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개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 부모님 댁 동네가 정말 작은 시골마을이고, 소문도 매우 빨리 돌고, 앞선 포스팅에도 썼지만, 저녁에 치킨을 시켜 먹으면 다음 날, 어제 닭 잘 먹었어?라는 인사를 듣는 곳이다. 시간이 몇 시건 아랑곳 않고 서로를 방문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계속 살아온 나는, 이런 문화가 익숙지 않다. 나는 좀 조용히 쉬고 싶은데, 하루에 한두 번은 꼭 손님이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와 한참 담소를 나누다 가신다. 인사를 하러 나오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난 듯 뒷 말이 많다. 얼굴에 큰 흉터가 있나, 성격적 결함이 있나, 기타 등등. 나의 사회적 상태 - 나이, 결혼 여부, 휴직 등등은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감히 이해받을 엄두를 내서는 안된다. 나 대신에 이런저런 부연설명 - 때로는 불필요하거나 왜곡 편파적인 설명을 하시는 부모님께 죄송스럽기도 답답하기도 하는 복잡 미묘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다.
나는 좀 조용히 살고 싶은데, 시골마을에 숨어서 산다는 말은, 시골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시골에 숨어사는 주인공 얘기는 가짜다. 당신은 시골에서 절대 숨어 살 수 없다. 정말 숨고 싶다면 도시로 가야 한다. - 부모님 댁에서 이걸 발견했다.
부모님 댁에서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거문고인가 싶은 크기의 큰 물체를 발견. 커버가 낡고 낡아 구멍이 송송 뚫린다. 그 안에서 거의 동생 나이와 비슷한 수준의 병풍이 있는 것이다!! 병풍을 해체하니 그 안에 표구할 때 쓰인 오래된, 오래되어도 정말 오래된 신문이 나왔다. 만질 때마다 바스락 부서진다. 전부다 오늘 저녁에 해먹을 가마솥 감자탕 땔감으로 아궁이행이다. 신문사는 뭐, 노코멘트지만 그동안 이 종이가 가족과 함께 해온 시간이 대견하고, 어쩜 이렇게 표구가 꼼꼼히 잘 되었는지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한 장 남겨두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 하루도 갔다. 내일은 정말 책 정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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