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9] 코로나 시대에도 친구는 생긴다.

2020. 4. 20. 00:02별 일 없이 산다

1. 우리는 모두 서로 거리를 두며 다닌다

이틀간의 24시간 완전 통행금지가 풀리고, 오늘부터 다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도보 이동이 가능해졌다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산책 준비를 했고, 10시가 되자마자 집을 나섰다날씨는 많이 따뜻해졌고, 공기도 상쾌하다. 아직까지 슈퍼마켓, 은행, 통신서비스 등 기본적인 생활 유지에 필요한 분야만 영업을 하고 있고, 다 문을 닫은 상황이라 거리가 매우 한적하지만, 나처럼 바깥공기에 목마른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우리는 모두 서로 거리를 두며 다닌다. 누군가 나와 같은 방향에서 걸어오면, 마주치겠다 싶은 지점에 이르기 전에 누군가 하나는 알아서 길을 건너 반대방향으로 간다.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마스크를 끼고 뛸 수는 없으니, 경보로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시작점과 도착점은 같지만 방향은 늘 다르다. 좀 많이 헤매는 날은 한 시간 넘게 걷고, 막다른 골목을 만나지 않고 길이 풀리는 날은 30분 정도면 산책이 끝난다. 무작위로 방향을 잡아 동네 산책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거의 모든 길들은 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내가 늘 지나치는 골목이 이렇게 저렇게 하여 오늘 처음 걸어본 낯선 길과 이렇게 저렇게 닿아 엮인 작은 사거리를 발견하게 되면 정말 신난다. 기분이 좋아진다.

 

 

2. 내가 원래 말이 많아요 ㅎㅎㅎ

오늘은 막다른 골목을 두 번이나 만나서 생각보다 많이 걷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걸음이 느려진다. 집에 거의 도착해서는 마스크를 벗었다. 천천히 느리게 걷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건다.

 

한국 사람이에요?’

 

건너편 옆집 발코니에서 빨래 널며 몇 번 본 적이 있던 여자였다. 쓰레기를 버리려 내려온 모양이었다그녀는 필리핀 사람이었다. 이 나라에 와서 산지 10년 가까이 되어가고, 방이 5개나 있는 저 아파트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살림을 맡아 일을 한 지는 3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집이 엄청 큰가 보다. 하긴 저 집엔 발코니가 두 개가 있지.

 

중국인일까 한국인일까 헷갈렸는데 말투 보니 한국 사람 같아요.

내가 한국 드라마를 엄청 많이 봐서 한국인들 말투에 익숙하거든요.

 

여기 아파트에서 일하기 전에는 한국인 집에서도 한 1년 일했었어요.

그때 한국 음식 배우면서 정말 좋았는데,

그 집 식구들이 임기가 끝나서 한국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다른 일자리를 구해야 했어요.’

 

갑자기 쏟아지는 정보에 잠시 어리둥절. 내가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까 망설일 필요도 없이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요즘 한국 드라마 크래쉬랜딩온유 봤어요? 정말 재미있어요.

안 봤으면 꼭 보세요. 한국 정말 좋아해요.

한국에 가서 일하는 게 꿈이에요. 여기서는 올해까지만 살까 싶어요.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어요.

일단 한국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드라마 보면서 열심히 배우고 있지만, 사실 말은 잘 못해요.

알아듣는 건 좀 할 수 있지만요. 시험을 보려면 쓰기 읽기를 잘해야 하는데, 아직 읽을 줄은 몰라요.

 

내년에 필리핀 돌아가면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보려고요.

그나저나 웨스턴유니언 통해서 집에 돈을 보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3월에는 집에 돈을 못 보내서… 제가 돈을 보내줘야 하거든요. 알죠? …’

 

그녀는 잠시 양손을 흔들었다. 어렵다는 뜻을 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뭐라 답을 해줄 사이도 없었다.

 

‘얼마 전 은행 영업 다시 시작하자마자 3월치 월급을 보냈고,

이제 4월치도 다음 주에 보내려구요.

필리핀도 지금 코로나 때문에 많이 어려워서 돈을 안 보내주면 가족들이 힘이 들어요.

 

우리 집주인은 친절한 편이에요. 같이 걱정을 많이 해줬고,

돈을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려고도 했는데, 암튼 다행이에요.

 

여기 집은 노부부가 주인인데, 아내의 여동생이 지금 같이 지내요.

미국에서 왔는데, 3월 초 휴가차 방문했다가 못 들어가고 있어요. , 국경이 봉쇄됐잖아요.

이 사람 때문에 빨래가 많아요. 실내에만 있는데도 옷을 너무 자주 갈아입어서…

근데 문제는 이 집 자식들이에요. 두 명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로스쿨을 다닌다던가….

암튼 그런데 미국이 지금 엄청 난리잖아요. 부부는 자식들이 이 나라로 돌아왔음 하는데,

지금 이 나라가 누구 건 들어오고 나갈 수가 없으니까….’

 

근데 엊그제 뉴스 봤죠? 정부에서 해외에 있는 자국민들 들어오게 하겠다고.

그래서 지금 노부부가 아주 기대에 차있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은 거기에서 결혼을 해서 손자까지 있는 모양이에요.

가족 모두 빨리 데려와야 한다며 아저씨가 바쁘세요.

덕분에 나도 지금 방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네요. 침구며 커튼 다 빨아두라고 해서요.

그 집 손자는 이 집에서 3년 일하면서 한 번도 못 봤는데, 사진으로는 봤죠. 귀엽게 생겼더라구요.’

 

 

그녀는 낯선 나를 한 10분은 붙들고 그야말로 ‘봇물’ 터진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저 집 가족들과는 대화를 안 하는가? 우리 서로 아는 사이인가? 어디선가 이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나?

 

나는 한국말을 쓰고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랍어는 쓸 줄은 모르고 말은 할 줄 알구요. 한국에서 일할 날이 올까요?

그런데 한국은 언제 돌아가요? 여기서 무슨 일 해요?’

 

 

드디어 내가 입을 뗄 기회가 생긴 건가? 나 역시 이런 대화의 순간이 흔치 않기 때문에 반가웠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녀가 당황스러운 속마음이 얼굴이 비쳤나 보다.

 

, 내가 원래 말이 많아요 ㅎㅎㅎ

 

입을 가리고 웃는 그녀의 얼굴이 천진스럽다. 얼굴의 절반은 가린, 마디가 굵은 그녀의 손에 눈길이 간다. 나보다 한참은 어릴 것 같은 귀여운 상인데, 정수리와 옆머리에 새치도 눈에 들어왔다. 나도 괜히 그녀를 따라 웃었다. 대답을 하려는데 그녀가 또 기회를 낚아챘다.

 

 

아무튼 반가워요. 발코니에서 봤어요.

이곳에 동양인이 별로 없는데 반가워서 기회가 오면 꼭 인사해야지 하고 있다가

좀 전에 저만치서 걸어오는 거 보고 기다렸어요.

종종 얘기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그럼 또 만나요

 

 

그녀는 내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활짝 웃으며 뒤돌아섰다. 환한 웃음 사이로 아래쪽 어금니가 비어있는 게, 또… 내 눈에 들어왔다.

 

 

3. 동네 발코니 하나하나, 다 사연 없는 집이 없다.

오늘도 역시 통행금지의 하루가 거의 지나가고 있다. 매일 똑같은 날 같은데, 오늘의 해를 보내는 오늘의 하늘은 늘 모양이 다르다. 해 질 녘 즈음되어 발코니에 나갔다. 건너편 옆집 발코니의 필리핀 그녀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 보였다. 다음에 그녀의 이름을 물어야지.

 

동네 발코니 하나하나, 다 사연 없는 집이 없다. 저 집에 지금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자식 두 명이 있는 줄은 몰랐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하루하루 타들어갈까. 이곳 소식을 전하는 영문 뉴스의 덧글을 읽는다. 외국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자국민 귀국을 부분적으로 허가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유난히 마음 아픈 덧글들이 많았다. 출장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도 있고, 유학생을 둔 부모들이 기사를 반가워하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신께서 모두를 안전하게 지키실 거라는 바람을 잊지 않고 나눈다.

 

오늘 만난 그녀의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필리핀도 상황이 좋지 않을 텐데... 그나저나 이따가 필리핀 내 친구 조안에게 연락을 함 해봐야겠다. 통행금지로 마닐라 집에 가지 못하고 직장이 있는 팔라완섬에 몇 주째 갇혀 있는 친구에게도 또 다른 사연이 있겠고…. 코로나가 만들어낸 이 모든 세상의 사연들을 통해 과연 인류는 어떤 공동의 교훈을 만들어 낼지 궁금해진다.

 

4. 통금과 봉쇄로 점철된 코로나 시대에도 친구는 생긴다.

건너편 옆집 발코니에는, 오늘 오후 만난 그녀를 분주하게 했을 침대보니 커튼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빨래를 다 널고 들어갔나 싶었는데, 다시 그녀가 보인다. 이번엔 길쭉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통금과 봉쇄로 점철된 코로나 시대에도 친구는 생긴다. 일상은 이렇게 반복된다. 다음엔 그녀의 이름을 꼭 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