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23] 길들이고 길들여지기...

2020. 2. 23. 19:23별 일 없이 산다

https://www.etsy.com/listing/279713406/the-little-prince-inspirational-quote

 

몇 번째 집인지 세보다가 관뒀다. 실제로 종이와 연필을 꺼내들고 적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너무 많다. 

 

이곳에 온 후 10일 만에 아파트를 구해서 이사를 했다. 2019년도 12월 13일부터 지금까지 부모님 댁에 잠시 머물렀던 며칠을 제외하고는 거의 두 달을 계속 호텔에서 지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정말로 내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짐을 못 푼 채 필요한 물건만 꺼내놓고 쓰는데 슬슬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은 아니었지만, 결정을 했다. 구하고 나니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곳이 되었다. 근처에 식료품을 살 수 있는 대형 마트가 모두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었고, 아주 가까이에는 작은 슈퍼도 있었으며, 시내 어디를 가던지 금방 이동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집은 너무 추웠다. 아니, 이 도시 자체가 너무 추웠다. 한국의 온돌처럼 실내외가 바로 구분될 수 있는 난방문화가 그리웠다. 게다가 이사한 후에야 침실 난방기가 고장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덜덜 떨면서 4일을 보낸 이후에야 집주인은 난방기를 고쳐주었다. 

 

2주 정도 지나고 나니, 이제는 어둠 속에서도 어디어디에서는 조심해야 침대 프레임에 정강이를 멍들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지 (창문 셔터를 내리면 칠흙같은 어둠이다), 1시간을 데우면 온수를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난방기는 쓸데없이 천정만 덥히니 침대에서 자야 하는 나는 여전히 아래 공기를 덥히기 위해 라디에이터를 켜야 하며, 물건을 어디 어디에 두어야 편한 동선이 되는지도 파악했다. 부엌의 살림들은 처음엔 엉망진창 다 식탁 위에 쌓여 있다가 하나씩 자리를 잡았고, 거실 가스난로를 켤 때 어떻게 하면 한 번에 바로 라이터로 불을 붙일 수 있는지도 요령이 생겼다. 이곳도 여전히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지만, 그래도 꿋꿋이 분리수거를 하면서 종이류와 비닐, 페트병류 등을 구분할 수 있는 공간도 자리를 잡아주었고, 빨래 건조대는 집안 어디에 두어야 제일 잘 마르는지도, 몇 시에 빨아야 온도는 낮아도 햇볕이 뜨거운 대낮에 바짝 빨래를 말릴 수 있는지도 알았다. 창문에 설치된 셔터를 내리고 올리는 요령도 생겼다. 상당히 팔뚝 운동이 될 듯. 부엌에서 차를 만들어 마실 때, 셔터를 어느 정도 내려야 밖에서 안은 잘 안보이지만, 안에서 밖을 보며 오가는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는지도 알았다. 

 

설거지 한 그릇을 햇볕에 건조하기 위한 부엌 창문을 제외하고, 이제 이 공간의 모든 창문들은, 엄선된 기준으로 맞춰진 높이로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으며, 아침 기상 알림은 30분 간격으로 두 번 맞춰 두었다. 온수를 편안하게 쓰기 위해서 보일러를 미리 켜두기 위한 비몽사몽 기상과 샤워를 하기 위한 정식 기상.  

 

한 2주 정도 걸린 것 같다. 예전 같으면 모든 짐 정리를 몇날며칠이고 잠도 안자고 최단시간에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는데... 이제는 많이 느긋해졌다. 이 공간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실내에서도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추위 속에서도 즐겁게 즐겼다. 내가 이 공간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에 맞게 내가 길들여지면서 만나는 상황들이 재미있었다.  모든 짐들을 다 늘어놓고 2주를 정리되지 않은 채 느긋하게 지내면서 이젠 충분히 편안해졌고 길들여졌다. 오래 있지 않을 곳이지만, 이제 이 곳도 훗날 무척 그리울 공간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시 가서 인사를 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아졌다. 빈트훅의 어느 사거리 - 감자칩을 늘 사던 주유소 옆 작은 슈퍼마켓, 마닐라 까띠뿌난 시티은행 뒷편의 국수 요리를 잘하는 음식점, 리즈의 모리슨 슈퍼마켓, 도도마의 기가 막힌 미시카키집, 성경에 나오는 저주 같았던, 날파리떼가 입으로 막 들어오던 므완자 말라이카 호텔의 마사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부줌부라의 넘버원 빵집, 신양가의 기텡게 수선집, 씨엠립의 소카 호텔 뒤편 쌀국수, 길 건너기 참 어려운 4차선 대로 건너편 브라운 커피... 뭐 그런 게 몹시 그립게 되었다. 웅장한 자연의 거대함을 자랑하는 피쉬리버 캐년, 빅토리아 폭포, 오카방고 델타, 응고롱고로, 세렝게티, 보라카이 해변, 마추픽추, 나미브 사막보다.... 나는 매일매일 걸어 돌아다녔던 뒷골목들 구석구석이 더 그립다. 매우, 그리고 몹시. 그리고 이 아파트도 그렇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