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0. 00:28ㆍ한 걸음 한 걸음
친절한 함단은 전날, 옷을 따뜻하게 입고 오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제라쉬 가는 차를 운전해주기로 한 분이다. 제라쉬는 암만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 친구로부터 대중교통으로 제라쉬까지 가는 길은 자세히 설명을 들었지만, 코로나 확진세가 심상치 않아서 고민을 하다가 차를 렌트하기로 했다. 코로나 일일 확진자 수가 최근 8천명까지 올랐다가 그래도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모를 일이다. 무사히 일정대로 출국하기 위해서는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남은 시간 동안 어디를 가볼까 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버킷리스트였던 페트라와 와디럼을 달성했으니 한결 여유로웠다. 제라쉬는 요르단에서 페트라, 와디럼 다음으로 가보고 싶었던 곳이긴 하지만, 움 카이스, 아즈락 등등 가볼 곳이 너무 많아서 갈등이 되긴 했다. 행복한 고민이지.
중동의 폼페이라 불리는 제라쉬는 그리스 로마 시대 번성했던 도시 중 한 곳이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잘 보존된 고대유적지로 손꼽힌다고 한다. 유적지 중 가장 오래된 흔적은 BC 1200-1000 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다. 제우스와 아르테미우스 신전부터 로마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교회, 당시의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발견된다.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고, 남문, 북문 공연장의 경우는 코로나 이전까지는 실제 공연도 열리곤 했다 한다. 코로나 때문에 이 나라에서 제대로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친 게 참 많다.
news.v.daum.net/v/20190719164932915?f=o
'역사의 숨결과 함께'..요르단 제라쉬 유적지 문화예술 축제
(암만 EPA=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북쪽으로 46km 떨어진 고대 로마 유적지 제라쉬에서 열린 '2019 제라쉬 문화예술 축제' 개막식에서 가수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제라쉬
news.v.daum.net
함단의 문자 이후, 여행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함단이 전문가이드가 아닌데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코로나로 사업이 너무 어려워져서 전문 가이드를 섭외하기 어려웠단다. 원래 일정대로 함단과 같이 가면 일반 차량 렌트 비용으로 깎아주겠다 한다. 아니면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하는데, 나는 이미 아카바와 마다바, 사해 등의 일정이 잡혀 있는터라 일정을 바꾸기는 곤란했다. 게다가 이미 함단의 따뜻한 문자에 좋은 인상을 받았던 나는 괜찮다고 했고, 여행사는 그의 차가 엄청 좋은 차라며, 편안하게 잘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드디어 제라쉬를 다녀오는 날. 사실 제라쉬와 알리준을 같이 다녀왔는데 알리준은 그냥저냥 마음에 남지 않아서 사진 정리 생략. 여행사 말대로 함단의 차는 정말 좋았고 (Range Rover Defender라고 자랑스럽게 쓰여있었다), 대체 이런 차를 모는 사람이 왜 하루 렌터카 운전기사를 한다 했을까 몹시 궁금해져왔다. 이게 정말 함단 차일까? 제라쉬도 궁금하지만 함단도 궁금하다.
고대 유적지에 관심이 많은 나는 제라쉬가 페트라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 페트라가 죽음과 삶을 모두 기억하는 신비한 공간이라고 한다면, 제라쉬는 생활이 묻어나는 인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라고나 할까. 날씨도 화창했고,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볕은 포근했으며, 역시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한 것이 좋았다.











어마어마한 시간과 사연을 담았을 저 돌조각 옆에 있는 휴지통이 인상 깊었다.
세상에서 제일 출세한 휴지통이 아닐까.

제라쉬에는 South & North Theater 두 개의 극장이 있다. 이 중 South Theater가 더 큰 것 같다.

위 사진이 South Theater

이건 North Theater
극장 계단을 하나하나씩 차곡차곡 밟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즐거운 산책을 했다.
최근까지도 극장으로 쓰이고 있긴 하지만, 당시는 어땠을까 상상을 해본다.
누가 와서 노래를 불렀고, 누가 와서 노래를 들었을까.
그들도 오늘을 사는 사람들처럼 피곤하고 지쳐도 소소한 행복으로 일상을 이겨나갔겠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당시 건물을 상상해볼 수 있는 이미지를 넣어 제라쉬를 소개했다. (링크는 아래에)



제우스 신전에서 내려다본 Oval Plaza
나는 사진 찍는 재주가 없어서 제라쉬 사진을 잘 소개하신 블로그 링크 하나를 아래 소개

북문에서 다시 입구로 되돌아 가는 길
이때의 산책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지진을 겪고도 잘 보존된 길이 대견하고, 그 사이사이 초록색 빛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풀들도 대견하다.
바람은 쌀쌀해서 코가 살짝 시리지만 햇볕은 뜨거워서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던,
아마 오전 11시쯤 되었던 것 같다.
이때의 산책이 참 좋았다.
평소 마음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주말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이곳에 와서
하루 종일 놀다 갔을 정도로 소풍하고 산책하고 잡다한 상상하기 좋은 곳이다.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와트에서 한 달 유효 7일 이용권으로 매주 앙코르와트 산책을 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하고 싶은 일들을 많이 이루며 살았네. 새삼 모든 것이 감사하다.

함단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모 은행에서 Client relation 담당업무를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해고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생활이 얼마나 암담해졌는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하반기에 학교 개강시키고 나서 비싼 수업료를 내게 해놓고는 바로 온라인으로 전환시키고, 기준 없이 내리는 코로나 대응 정책에 대한 불만이 많다. 그리고는 알리준으로 빨리 이동하자고 재촉을 한다. 알리준은 그의 고향이고 보여줄 곳이 많다나.
나는 아직 이곳 구석구석 상상할 것이 많은데,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은데 알리준으로 길을 나서야 했다. 이 아쉬움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더 이곳에 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주차장에 이르러서도 함단은 불평을 멈추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호기심을 채운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넌 이 차를 팔면 되지 않을까? 이 차 엄청 비싼 차 아냐?' 그랬더니 그는 이미 충분한 대답을 담은 표정을 짓는다. '아냐, 이 차 내 차 아냐. 여행사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친구에게 빌리는 거야. 친구에게 30% 정도 수익을 나눠주고 있어. 이 차는 사실 그 친구 아버지 차야. 그 친구는 다른 차가 또 있지. 내 차는 지금 수리 중인데 잔금이 없어서 차를 못 찾아오고 있어...(이하 생략).' 그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댓가를 받아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이 여행사는 안되겠네. 혹시라도 사고나면 처리는 어떻게 하려나.
수 천년 전 이곳에도, 함단 같은 사람이 있었겠지. 그렇게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우리네 사는 이야기는 변함없이 늘 그렇고 그렇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채워 넣어야 하는 기본적인 수고에 힘들어하는 우리 모두가 있었겠지. 그리고 오늘 밤처럼 이렇게 추운 날, 화려한 아르테미우스의 신전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아침을 기다리는 노숙인들도 있었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제라쉬에는 영하 17도로 내려가는 일은 없겠지만, 그 나라도 엄청 춥다. 집안에서도 코 시리고 발 시리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따뜻한 온돌 바닥에 앉아 떠올려보는 지난 12월의 기억이 참 낯설다. 그리고, 그립다.
제라쉬 추가 정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라쉬 소개는 지진으로 붕괴 전 당시 건물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해 준다.
www.nationalgeographic.com/history/magazine/2019/09-10/jerash-ancient-city-of-jordan/
Rome brought pomp and prosperity to this ancient outpost in Jordan
A trading hub with a storied past, Jerash grew wealthy under Roman rule. The city's fantastic monuments still shine today as a beacon of its imperial past.
www.nationalgeographic.com
제라쉬에 대한 블로그 중에서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곳 (제라쉬 유적지 지도 포함)
Sharing the Best Photos of our Once-in-a-Lifetime Trip to Petra, Jordan this Past January (Part 1: Jerash) - Annette Gendler
This past January I was fortunate enough to be able to cross one of the places I always wanted to see off my bucket list: Petra, Jordan. Mind you, this […]
annettegendl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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