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7. 04:43ㆍ별 일 없이 산다
시골버스를 타면 개똥 철학자가 되는 기분이다.
버스는 때론 한 두 명의 손님만을 태우고 달릴 때도 많지만,
장날이 되면 좌석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버스를 탈 때마다 내 머릿속은 서울시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처럼 오만가지 잡생각이 가득하다.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것이 큰 수고인 노인들이
혹시라도 버스를 놓칠까 싶은 마음에 늘 미리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고,
혹시라도 버스가 그냥 지나칠까 싶어
저 멀리 버스가 보이면 미리 손을 흔들며 조금이라도 버스 가까이 가시려 힘든 걸음을 옮기신다.
저렇게 버스 가까이 가시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은데.
힘겹게 계단을 오르시고 조심스레 한 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으시지만, 참 씩씩하시다.
버스는 거의 한 시간에 한 대 운행하는 수준이지만,
이 버스가 없으면 운전을 하시기 어려운 시골 노인들은 완전히 발이 묶인다.
매일 몇 종류를 드셔야 하는지 세기도 어려운 여러 가지 약들을 정기적으로 처방받기 위해,
시골 마을 구멍가게에서는 팔지 않는 물건들을 구입하기 위해,
시골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필수 생존 서비스들을 이용하시기 위해 이 분들은 버스를 타셔야 한다.
버스가 텅텅 빌 때가 있다해도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이다.
인구가 적은 지역의 버스운행을 국가예산으로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지만,
버스를 달리게 하는 것이, 대한 민국의 모든 시골마을에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소도시 수준의 병원, 학교, 시장 등등의 서비스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훨씬 싸다.
서울에 다녀오거나 여행을 갔다가 부모님댁으로 돌아오는 길,
시내 종합터미널에서 시골 중 시골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은
정말이지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세상 더없이 진지해진다.
나도 노년이 되면 그리고 운전을 할 수 없게 되면,
별다른 선택지 없이 이렇게 시골마을버스에 의존해야 할 수도 있을 텐데
저분들처럼 씩씩할 수 있을까.
집에 도착해서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동네에서 서울댁이라고 불리시는 엄마는, 내가 엄마의 새로운 동네를 시골이라 부르니
이 정도는 시골 아니라며 역성을 들며 동네 자랑을 시작하신다.
어디 깡촌 시골에 우체국이나 농협 은행, 그리고 이것저것 다 살 수 있는 농협마트가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다디!!
느리고 불편하지만, 여유롭고 소박한 시골 생활에 엄마가 이젠 잘 적응하신듯 하여 반갑다.
나는 여전히 시골버스는 '불편'하다.
하지만 엄마 동네 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에 의존해서 제주 올레 걷기를 하면서
버스 시간에 맞춰 하루를 계획해야 했던 올 한 해는
물리적인 활동 반경에는 제약이 많았을지언정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면 차마 상상하지 못했을 불편 체험을 통해 생각의 반경은 넓어졌다.
씩씩하게 늙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이고,
지역 격차를 줄이기 위해 어떤 정책이 있고, 어떤 활둥들을 하는가 더 주의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계절이다 보니 올 한 해 무엇이 제일 감사했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올 한 해 시골버스와 함께 보낸 시간들은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사한 순간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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