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1. 14:05ㆍ한 걸음 한 걸음
가파도는 처음이다. 3월에서 5월까지 18만 평이라는 감이 오지 않는 넓은 땅에 자라는 청보리 축제로 유명한 곳이라는데,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축제는 취소된 모양이고, 이맘때쯤의 가파도는 주황색 코스모스로 아름답다고 한다. 올레에는 가파도, 우도, 추자도 - 이렇게 3개의 섬에 길이 있는데, 그나마 가장 마음의 부담이 적은 길이다.
거리도 4.2km로 2-3시간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어서 시작하는 발걸음이 매우 가뿐했다. 물론 신분증 분실하는 생난리를 겪을 줄은 이땐 몰랐지. 바람막이 잠바에 디자인이 처음부터 주머니 인척 하지만 실제로는 뻥 뚫려있어서 주머니가 아닌 속주머니에 운전면허증을 넣었다가 분실하고, 분실 신고로 재발급하고 다시 찾고... 작은 소란이 있었으나 가파도에서의 3시간은 하늘을 향해 걷는 듯한 묘한, 현실감각을 잃게 하는 붕 뜬 느낌이었다. 날씨도 오랜만에 정말 좋았다.
가보고 싶은 섬 APP에서 예약 예매를 하고, 운진항에서 승선확인서를 작성한 후 티켓을 받으면 된다. 운진항까지는 가는 버스가 많아서 버스 대기 시간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10시에 들어가서 오후 1시 20분에 나오는 표로 예매했다. 나오는 시간은 가파도 매표소에서 바꿀 수 있다고도 한다.
가파도 항구에 도착.
아주 오랜만에 푸르게 반짝거리는 환한 바다를 만났다.
한동안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이런 날씨를 만나는게 더욱 감사하다.
가파도에는 출발과 도착지점 이렇게 두 군데에만 도장을 찍는 곳이 있다.
선착장 바로 앞에 출발지점을 알리는 늘 반가운 안내판이 있고
보통 제주도에서 다른 올레길을 걸을 때는 하루에 한 두 그룹 정도 다른 올레 여행자들을 만날까 말까 하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도장찍는 곳에 모여있었다.
가파도는 사람이 진짜 살고 있나 싶게 아기자기하다.
파란 하늘과 그 보다 더 선명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초록 지붕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진짜 사람이 살고 계신가 궁금해졌다.
나중에 시간이 모자랄까 싶어서 주변을 어슬렁 대볼까 하는 마음을 접고 계속 길을 이어 걷는다.
나 같은 이런 관광객들이 많아서 참 번거로우시기도 할 테고.
사진 위 왼편에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 마라도이다.
가파도 서쪽으로 가면 마라도가 점점 더 크게 보인다.
고양이같이 생긴 돌이라는데,
어떻게 보아야 고양이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 저기 방향을 달리해 둘러봤는데 고양이는... 잘 모르겠다.
가파도는 돌담이 멋지다고 한다. 담을 쌓은 돌 하나하나가 모두 수석이라는 설명이 안내판에 쓰여있다.
3-5월 사이 청보리밭으로 장관을 이룬다는 곳에 지금은 이렇게 주황색 코스모스가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라산, 송악산, 산방산 그리고 주변의 크고 작은 오름이 보여서
가파도의 풍경은 지루할 새가 없이 아름답다.
위부터 시작해서 아래 몇몇 사진은 소망전망대 주변
관광지답게 꾸며놨다.
이렇게 안해놔도 충분히 아름다울 곳인데,
사진 찍기 좋으라고 만들어놓은 팻말들이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거슬리기도 하고 그렇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마라도
구름 때문에 정상이 가려있지만, 한라산도 멀리 보인다.
여기도 말이지, 왠지 길이 끝까지 이어져 있어서
넋 놓고 걷다 보면 바로 앞에 보이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입구까지 가게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약간 비현실적이라고나 할까.
저기 보이는 빨간 건물은
녹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벌판과 푸른 하늘,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 넓게 펴바른 듯한 구름과
정말 잘 어울린다만, 방향을 잘 잡아서 찍지 않으면
저 건물의 정체성, 편의점이라는 글씨가 크게 보여서 조심해야 한다.
빨간 건물에 정신이 번쩍 들도록 선명한 하얀색 간판으로 되어있다.
어멍, 아방돌 - 여기 돌 위에 올라가면 파도가 높아진다 하여 사람이 올라가는 것을 금기시한다고 한다.
여기서, 운전면허증이 주머니인척 하는 속주머니에서 빠져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올레길은 한 1/3 쯤 남아있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고,
배를 탈 때 신분증을 확인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추석 때 집에 가야 하는데 비행기를 어떻게 타나,
수화물을 부치지 않으면 생체인식을 해두었으니 신분증 제시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짐이 뭐뭐가 있나,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신분증을 잃어버려 악용될 위험도 있고, 여러 불편한 것이 있겠지만
세상 살다가 잃어버릴 수 있는 것 중에 신분증은 사소한 일이 아닌가.
사람을 잃어버리고,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하며 나를 다독인 일이다 ㅎㅎ
그리고 여기 가파도에서 뭔가를 분실한 것이 다른 곳에서 보다 훨씬 낫지 않나,
가파도가 희안한 방법으로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겠네, 하는 한가한 생각도 들었다.
신분증을 잃어버리건, 정신줄을 놨건
이날 가파도의 자연은 너무나도 가까이에 완벽하게 있어줘서
오히려 신분증을 잃어버린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막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은 구름을 시선 바로 앞에다가 두고 걷다 보면 이런 비현실감이 생기게 된다.
게다가 오름이나 봉이 아닌 산이 제주도에는 모두 7개가 있는데
그 중 영주산을 제외한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군산, 고근산, 단산까지 6개의 산을 가파도에서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단산만 못 가봤네. 어디 있는지 검색해보니 대정읍 인성리 쪽에 있네.
올레를 다 걷고 나서 함 가봐야겠다.
이곳은 해마다 음력 1월이면 마을 제사를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제관으로 뽑힌 마을 남자 7명은 3박 4일 동안 제단 집에 머물려 부정을 피한 뒤
돼지와 닭 날 것을 제물로 제사를 올린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도착점에 이르러 올레 도장을 또 신나게 찍어주고,
이제 10번 정도 더 걸으면 26코스를 완주하게 된다.
9월에 다 완주하고, 10월은 다시 가고 싶은 곳을 골라서 가는 것으로
올해 10월까지의 제주 걷기를 마무리 하려고 해서
마음이 그야말로 행복하게 조급해진다.
이런 조급함만 느끼면 좋겠는데,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 거의 모든 것의 '마감 준수' 조급함으로 시간에 무진장 후달리게 되겠지만,
일단 지금은 이 즐거운 조급함을 잘 기억해두기로 한다.
사진 정중앙 수평선에 걸린 것이 마라도
하늘이 그림같이 예쁘다.
구름이 어쩜 이렇게 입체감 있게 얇고 넓게 퍼져있는지.
손을 쭈욱 뻗으면 구름을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은 하늘이다.
가파도 터미널에 도착해서
(터미널 간판? 폰트도 참 예쁘다. 보리밭 빨간 건물 편의점은 가파도 터미널을 보면 배우실 것이 있을텐데...)
매표소 직원분께 신분증 분실건을 설명드리고 혹시 누가 주워다 놓지는 않았는지 여쭸다.
없단다.
가파도에서 내 운전면허증을 다시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본다.
매표소 직원은 연락을 주겠다며 기다려보란다. 신분증이 다시 회수되는 경우도 아주 간혹 있다고 한다.
희망을 가져볼까 싶었지만,
나는 희망을 가지지 않기로 한다.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세상 살기 좋다.
그래서 바로 인터넷으로 분실신고를 하려 했는데, 분실신고는 따로 없고 재발급을 바로 하면 되는 모양이다.
이거 수령을 어케 하나, 원래 면허증을 발급받은 서울 강남 경찰서를 가야 하나, 싶었는데
우리나라의 전자시스템에 다시 한번 감동.
전국 어디에서든 수령이 가능해서
나는 9월 중순 제주도 제주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수령하기로 했다.
너무 편리하구나!!
선착장 항구에서는 누군가 1미터가 넘는 부시리를 잡았다는 웅성웅성 소리가 들린다.
가보니 팔뚝에 닻 모양 문신을 하신 아저씨가 아직 낚싯줄 끝에서 사투를 벌이는 부시리를
조심조심 힘 빼기 하시는 모습이 보인다.
가끔 물 위로 올라오는 녀석은 1미터는 넘어 보였다.
아, 부시리!! 갑자기, 그리고 매우 당연히 회가 몹시 먹고 싶어 진다.
그 순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고,
매표소 직원의 매우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분증 회수되었습니다. 어서 매표소로 오세요.
하루가 지나니 우리나라 막강 전자시스템이
새로운 면허증 발급 완료되었으니 수령일 잊지 말고 찾으러 오라고 카톡 문자를 보내왔다.
음.... 희망을 가져보는 편이 차라리 나은가.
면허증 분실을 매표소에 알리고 나서 면허증 재발급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그리고 이후 20분 후 멍청한 바람막이 주머니 인척 하는 속주머니에서 빠져나간 내 면허증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이런 경우, 희망을 가지지 않고,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속 편해서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20분 정도는 희망을 가져보는 편이 어떨까 싶으네.
가파도가 준 최고의 선물,
앞으로 20분 정도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뭔가 기다려봐도 좋겠어.
이 20분이 20시간이 되고 20일이 되는 날이 올까 싶지만,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20분은 멍청해 보일지언정 좀 기다려 볼까 싶다.
가파도가 준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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