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31] 제주 올레11길 - 무릉신평 곶자왈과 모슬봉

2021. 9. 5. 00:28한 걸음 한 걸음

올레 11길은 전에 부분 부분 걸었었다. 하모체육공원에서 산이물 공원, 대정청소년 수련관쪽은 올레 10길을 걸을 때, 그리고 무릉외갓집은 올레 12길을 걸을 때 인향동에서 내려걸었었고, 그리고 모슬봉 쪽도 예전에 올랐었고.  그래서 이번엔 인향동 마을회관에서 모슬봉까지 걷기로 하고 지도를 검색해본다. 

 

여러 루트가 있지만, 동광 환승정류장에서 버스를 갈아타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아 일단 그리로 방향을 잡는다. 거기서 761-1번이나 관광지 순환버스 820-1 또는 820-2번 중 빨리 오는 것을 타면 될 것 같다. 동광 환승 정류장 1번과 2번 쪽에 관광지 순환버스가 서는데, 2번 쪽에 버스 안내사무소가 있어서 일단 그리 한 번 가봤다.

 

2번 정류장에 거의 도착하자마자 사무소 문이 열리고 직원이 나오셔서 이것저것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신다. 순환지 버스는 30분마다 한 대씩 오는데, 동쪽의 오름을 다니는 810번 노선이 매우 흥미롭다. 관광지 버스에는 안내해주시는 분도 함께 타서 정류장마다 설명을 해주시는데, 가을 되면 810번 쪽 노선 인기가 많다고 한다. 9월에 올레를 다 걷고, 10월에는 810번 노선의 오름을 걸으면 어떨까 싶다. 가을이 기다려진다. 그나저나 이 순환버스 직원분들은 정말 친절하시네. 

 

 

딱 한 번이지만 어쨌든 와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인향동 마을회관이 반갑다. 

 

 

안내 화살표가 큼지막하니 시원시원하게 방향을 가리키고, 

 

올레 11길 위에 담긴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어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올레길을 걸으며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인간 한계에 부딪히게 될 줄은 몰랐지. 

이때까지만 해도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고, 발바닥도 시원했다. 

 

 

예래동 대왕수천처럼 연못 빽빽이 옥잠화가 가득하다. 

 

 

사진에는 잘 안 나왔지만, 위 사진엔 오른편에도 길이 있으나 

올레 11길은 왼쪽 편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무릉 숲길과 신평 곶자왈로 들어서는 길이다.

 

 

무릉 숲길바닥은 이런 바위로 되어있는 곳이 많다. 

 

아래 무릉 숲길 안내판을 읽어보자면, 

 

"무릉 곶자왈 숲길은 제주에서도 가장 긴 곶자왈지대입니다.

오래전부터 이곳 지역주민들에게 생명길과도 같은 중요한 길이기도 합니다.

곶자왈은 화산 분출 시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지면서

요철 지형으로 쌓여 지하수 함양 역할을 해줘 나무, 덩굴, 암석 등이 서로 뒤섞여 수풀처럼 무성히 자라난 숲을 의미하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숲이기도 합니다."

 

 

무릉 곶자왈은 다채롭다. 

울퉁불퉁 바위 바닥을 조심해야 하는 길도 있고, 

나무숲이 빽빽해서 하늘이 듬성듬성 보이는 길도 있고, 

이렇게 훤하게 하늘이 열린 길도 있다. 

 

 

이렇게 터널처럼 호기심을 일으키는 조용한 길도 있고, 

사그락 사그락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재미있다. 

 

 

올레 화살표는 언제 봐도 반갑고, 

혼자 걷는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친구가 되어 

다음 화살표는 어디쯤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길을 이끈다. 

 

 

 

 

무릉-신평 곶자왈이 끝나는 지점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화장실이고, 

 

아래 사진 속, 신평-무릉 사이 곶자왈의 시작점을 가리키는 간세를 도착점으로 해서 

즐거운 숲 속을 오롯이 혼자 차지했던 소풍을 마쳤다. 

 

이 지점에서 더 걸을까 말까, 갈등을 했다. 

오랜만에 구름도 비 예보도 없던 날이라, 시원하게 곶자왈을 택했는데 

여기서부터는 모슬봉까지 땡볕 아래 그늘 한 점 없이 동네를 지나야 한다. 

 

해찰하며 걷느라 한 3시간 정도 걸었기 때문에 하루 걷는 시간은 충분히 소화를 했으니 

여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그리 길지 않은 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니 왠지 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모슬봉 정상까지도 올라보기로 했다. 

 

 

 

모슬봉까지는 이렇게 맨살을 드러낸 밭을 양쪽에 끼고 한참을 걸어야 했다. 

다음 경작을 얌전히 기다리는 모양이다.

고슬고슬 붉은 팥가루 같기도 하고 노란 콩가루가 깔린 것 같기도 한 길을 걷는다. 

배가 고픈가...

 

 

조금 더 걸으니 송악산과 산방산도 멀리 보인다. 

 

길은 그늘이 없어서 매우 뜨겁고. 

 

 

정난주 마리아 묘를 지나면, 길 위 풍경이 조금 더 다채로워진다.

 

 

 

 

그리고 드디어 모슬봉 진입. 

지도로 보면 이 동네에만 공동묘지가 3개다.

상모리, 대정, 칠성 공동묘지.

 

근데 정말 모슬봉까지 오르는 길 내내 묘지였다. 

 

 

모슬봉 오르는 초입부터 경사진 산등성이까지 묘지, 묘지, 묘지다. 

 

그리고 이때부터 슬슬 인간 한계가 오기 시작했는데, 

아마 백신 이상 반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탓도 있겠고, 

땡볕에서 너무 해찰하며 길을 걷기도 했고, 

그리고 모슬봉 입구부터 경사가 가파르기도 했다. 

 

더 힘든 코스도 많았는데 오늘 왜 이럴까 싶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이려니 싶어, 공동묘지에 둘러싸여 한참을 쉬었다. 

한 30분 정도 물을 마시며 쉬다 보니 괜찮아졌는데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고 겸손하게 존중해줘야지 싶다 ㅜㅜ

아까 무릉-신평 곶자왈까지만 걸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모슬봉 정상을 보니, 공동묘지에서의 휴식이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 같다. 

 

 

땅에 가까이, 하늘에서는 멀리, 낮게 깔린 구름이 또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 주어서 고맙고 반갑다. 

 

 

 

내려오는 길에도 묘지가 많다. 

 

 

대정고등학교까지 내려와 숙소로 되돌아오는 버스 노선 검색해본다. 

해병대 앞에서 202번을 타면 되는데, 시간이 학생들 하교와 겹쳐서인지 버스가 붐볐다.

 


 

무릉-신평 곶자왈의 선선한 그늘과 정수리가 따가웠던 신평리 땡볕으로 극과 극의 걷기 경험을 하고, 

모슬봉 정상이 보여주는 사람 사는 동네의 크고 작은 지붕들,

그리고 한때 그 지붕 아래 살았을 사람들이 묻힌 공동묘지에서

턱까지 치고 올라온 가쁜 숨을 달래며 쉬었던 시간들...

오늘도 올레길에 나만의 기억을 남기며 하루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