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5] 서귀포 추억의 숲길 - 미니 원시림 체험

2021. 8. 12. 14:23한 걸음 한 걸음

서귀포 치유의 숲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추억의 숲길'. 치유의 숲은 예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대신 추억의 숲길을 걸어도 좋다고들 하는데, 꿩 대신 닭 같은 느낌이라 그렇게 소개하고 싶지는 않고,

더운 여름 뜨거운 대부분의 올레길이나 해변 대신, 시원하게 숲이 주는 그늘을 즐기고 싶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숲속에서 길을 잃을 때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생기는 스릴을 즐기고 싶을 때, 그때 가면 좋겠다. 물론 여기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은, 올레길 조차도 자꾸 헤매고 딴 곳을 찍고 오는 내 수준의 길치들에게만 해당이 되겠다.

추억의 숲길은 서귀포 중앙로터리에서 625번을 타면 되는데, 추억의 숲길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4번뿐이니 시간을 잘 확인하고 가야 한다. 카카오 맵에만 의지해서 시간을 확인해서는 안 된다. 나는 친절한 버스기사님을 만난 덕분에 중앙로터리에서 625번 타고 헬스타운(?) 분기점을 찍고 되돌아오는 버스 투어(?)를 하며, 반대편으로 추억의 숲길까지 가는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게 서귀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내려주셔서 무사히 잘 다녀왔다. 이제는 좀 외진 곳을 간다 싶을 때는 꼭 버스노선표 확인을 하고 다녀야지.

버스는 중앙로터리에서 오전 9시 20분, 10시 50분, 오후 1시 5분, 2시 35분,
이렇게 4대만 운행하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의 시간표를 반드시 잘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의 숲 정류장에서 내려서 온 방향으로 조금만 되돌아 내려가면 추억의 숲길 입구가 나타난다.

아래 사진은 치유의 숲에서 출발하는 버스 시간표

입구는 이렇게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곧 원시림이 나타나고, 올레리본 같은 것도 훨씬 더 드문드문 있고 하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서 걸어야 한다.
그렇게 걸었어야 했는데, 또 해찰하며 넋 놓고 걷다가 나는 길을 몇 번 잘 못 들었나 모른다 ㅠㅠ

원시림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숲이지.
바깥은 엄청 뜨거울 텐데 숲 속은 시원하다.
물론 길을 잃으면 오싹 한 것이 더 시원해진다.

한 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밭담이 허물어진 듯 아닌 듯 길게 이어진다.
이끼를 만져보면 폭신 폭신 한 것이 기분이 좋다.

당시 4가구 정도가 살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한라산 둘레길까지 이어 이 추억의 숲길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4.3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당시 뒤숭숭했던 분위기 탓에 중산간에 위치한 이 마을 사람들도 아랫마을로 이주하게 되어
이후 그들이 오랫동안 살았던 흔적들만 희미하게 남은 채 마을은 사라졌다고 한다.

길이 미끄럽고 돌이 많기 때문에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조심조심 정신 바로 챙기고 안전하게 걸어야 한다.

오르는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이런 한적한 숲길을 내가 다 차지한 듯이 여유롭게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드디어 한라산 둘레길과 만나는 편백나무 군락지에 도착.
쭉쭉 뻗은 편백나무숲에서 물도 마시고 조금 쉬긴 했는데
여기는 이미 4인은 훌쩍 넘어 보이는 다른 등산모임(?)에 의해 장악당해서 매우 시끄러웠다.

적어도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4명씩 따로 벤치에 앉아 과일도 드시고 화장도 고치시던데
벤치와 벤치를 오고가는 군것질거리와 즐거운 담화들이 화기애애해 보였으나
이 코로나 시국에 무슨 짓인가 싶다.

좀 조용하게 나도 피톤치드를 잔뜩 마시고 오고 싶었으나
다시 마스크를 단디 챙기고 되돌아왔다.

산 정상이나 이런 쉼터에서는 부디 제발 좀 조용히 조용히
남들도 배려하면서 조용히 조용히 좀 살자.


이끼가 정말 폭신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무들이 뿌리가 들려서도 멀쩡하게 잘 살아 쑥쑥 잘 크고
다른 나무들 못지않게 무성한 이파리로 그늘도 만들고
뿌리가 들려 공간이 생긴 곳은 동굴처럼 쉼터를 만들었다.

이런 나무들이 살았나, 죽었나 한 참을 올려다보았는데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저렇게 뿌리를 다 드러내고도 살아내는 생명력이 놀라우면서도
이런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자연을 훼손하는 인간의 이기심도 무섭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렇게 속살을 드러내고도 생명을 이어가는데......

이것도 뿌리가 들린 나무

또 나타난 뿌리가 들린 나무

한 3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숲길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혼자보다는 일행을 이루어 다녀오는 것이 안전하다 하는데
혼자 가도 무리 없다.
길을 잃어도 어렵지 않게 금방 다시 되돌아올 수 있고,
단, 편백나무 군락지 근처에는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도 있다만
한라산 둘레길에서 데이터 연결되지 않는 곳이 한 둘이 아니니 특이점은 아니다.

중간 중간 쉬어갈 수 있는 의자도 제법 있고,
폭신폭신한 나무이끼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좀 아늑한 느낌도 있다.
어쩔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 정돈된 관광지에서 벗어나
조금은 원시적인 걷기 체험을 하고 싶을 때,
서귀포 추억의 숲길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