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8] 제주 올레 18-1길 - 추자도!

2021. 10. 22. 00:09한 걸음 한 걸음

10월 20일, 우도 올레 1-1길을 마지막으로 425km 모든 올레길을 다 걷고 드디어 완주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4월 초부터 조금씩 여기저기 걷기 시작한 후 7개월 만이다. 내 인생에 이렇게 긴 시간, 여유롭게 해찰하며 걸을 기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사하기도 하고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올레 완주를 거의 앞두고 있을 무렵, 가장 큰 걱정거리는 추자도 올레였다. 우도나 가파도처럼 쉽게 갈 수 있는 섬도 아니었고, 코스도 18km가 넘어서 하루 만에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언제 가면 좋을까 달력만 보던 중, 10월 7일, 충동적으로 다음날 출발하는 1박 2일 일정으로 숙소와 배편을 예약해버렸다. 10월은 어찌하다 보니 백수 생활 2021년 중 제일 바쁜 달이 되어버렸고 날씨도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왠지 지금 아니면 못 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런데 그 느낌이 맞았다. 이 일기를 쓰는 10월 21일이 돼서야 하는 얘기지만, 10월 중순부터는 중간고사 6과목, B국 출장준비, 제주도 숙소 짐 정리해서 부모님 댁으로 옮기기, 서울 건강검진까지 정말 정신이 없다. 

 

아무튼 10월 초 한라산 등반의 후유증이 여진처럼 남아있는 다리를 가지고 충동적으로 출발한 추자도 1박2일 걷기는 올레 26길 중 Top 3에 들 정도로 어머어마한 경험이었다. 하루로는 너무 아쉬우니 꼭 1박 해야 할 것이고, 제주도 올레 26길의 종합 선물세트를 한 번에 즐긴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걷기 시작해도 좋다. 그러나 난이도가 '상'인 만큼 힘들 각오도 함께 해야 한다. 

 

추자도 상추자도 가는 배는 여기서 미리 예약 결제도 할 수 있다. http://www.seaferry.co.kr/  모바일로도 할 수 있는데, 모바일과 홈페이지 예약 인원수에 각각 쿼터가 있는 모양이다. 모바일은 만석인데 홈페이지에는 넉넉히 자리가 있었다. 

내가 탄 배는 퀸스타 2호로 쾌속선이고 제주여객선터미널에서 상추자도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하추자항으로 도착하는 레드펄 호도 있다. 이 배는 오후 1시 45분 출발이라 시간이 애매하고 쾌속선도 아니라서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퀸스타 2호를 타기로 했다. 제주에서는 오전 9시 30분에 출발. 왕복 13,400원이다. 

 

이 배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선박 점검 중이라 추자도 여행 일정 잡기가 쉽지 않았다. 운항 일정이 변동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전화를 해서 확인을 했고, 표를 예매하고 결제를 하더라도 승선권 발급은 현장에 가서 직접 해야 한다. 터미널에 모바일 발급기가 한 대 있긴 한데 무용지물이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작동을 안 해서 답답한 마음에 자그마하지만 인상 깊은(?) 건의를 하고 오기도 했다.  

 

숙소 예약도 쉽지 않았다. 갑자기 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내가 원래 머물려고 했던 숙소는 예약이 불가했고, 다른 숙소를 급히 찾았는데 막상 추자도를 걷다 보면 인터넷에 소개되지 않은 숙소들도 눈에 많이 띈다. 제주에서라면 3-4만 원 수준의 게스트하우스나 민박이 6만 원이다. 마트에서 내가 늘 세트로 사 먹는 간식도 추자도에서는 약간 조금 더 비싸다. 물가는 확실히 제주보다 비싼 것 같다. 당연하다. 제주와 전라도 바다 사이 딱 중간쯤 위치하고 있어서 말이지. 택배 비용이 추가되는 도서산간 지역의 아주 대표적인 곳이 되겠다.  

 

어쨌거나 작은 배낭에 최소한의 짐을 챙기고, 어디 가든지 가지고 다니는 노트북도 남겨 둔 채 갈아입을 옷과 물통만 챙겨  추자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아, 1박 예약 하기를 정말 잘했네,였다. 내리자마자 잠시 멈춰 서서 정신을 수습했다. 아기자기한 상추자항이 뜻하지 않은 환대를 해주었다. 여기 오기가 힘들어서 올레 완주를 포기할 생각을 했다니... 발걸음을 어디로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방이 아름다웠다. 상추자항을 내려다보는 등대산으로도 먼저 가고 싶고, 탁 트인 바다 멀리 보이는 추포도, 횡간도가 더 잘 보이는 하추자도 쪽으로 빨리 내딛고 싶기도 했다. 

 

 

한 대 있는 무인발권기는 작동하지 않으니 저 스탠딩배너는 무시해도 된다. 

어차피 줄을 길게 서서 기다려야 한다.

 

 

퀸스타 2호가 보인다. 재미있는 건 여기 여객선 터미널에도 면세점이 있다는 것. 

물론 추자도는 제주도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안되고

우수영이나 완도 가는 승객들만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드디어 추자항 여객선 터미널 도착

아담하고 깨끗한 터미널이다. 

 

 

여행자 센터이면서 올레 안내도 해주신다. 

직원이 어찌나 친절하고 싹싹하시던지 막무가내로 정보를 요청하는 손님들도 노련하게 응대하신다. 

한국에서 혼자 여행하면서 늘 느끼는 설움, 1인은 안 받아주는 음식점들이 많기 때문에 

나는 혼자 밥 먹는 손님을 잘 받아주는 식당이 있는지 여쭤봤다. 

몇 군데를 추천 받았는데, 하필 금요일에 문 닫는 곳들도 몇 곳 있었다. 

머릿속에 잘 저장해 두고 (이런 생존 정보는 기억이 잘 됨. 중간고사 과목들은 죽어도 잘 안 외워짐) 

오늘 계획한 하추자도 길을 향해 나선다. 

상추자도는 내일 오전에 정복하기로 한다. 

 

 

 

가장 엄두가 안났던 올레 18-1길인데, 도착하자마자 신이 났다. 

제일 먼저 올 걸 싶었다. 

아직 한라산 후유증이 남아 있어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난이도는 안내된 대로 그야말로 '상'이다. 

18-1길부터 올레를 시작한다면, 나머지 길은 어쩜 비교적 수월하게 걸을 수도 있겠다.

 

 

날씨도 완벽했다. 모든 게 다 반짝반짝거리던 하루였다.

 

 

여기는 무슨 문화 광장이라고 하는데 

추자도의 특산물이 굴비가 여기저기 조형물로 많이 전시되어 있다.

굴비는... 영광 법성포인데...

 여기 추자도는 예전에 전라도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인지 

익숙한 전라도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린다. 

그래서 더 정겨웠고.

 

 

상추자항 주변 마을은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하추자도 신양항쪽 마을도 그림 같다.

내가 왜 추자도에 이제 왔을까, 아쉬웠고, 왜 추자도가 올레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너무 이해가 갔다. 

다음에도 느긋하게 제주 올 일이 있으면 꼭 다시 올 곳이다. 

 

 

멀리 보이는 것은 등대산. 

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소박한 언덕이다. 

 

 

화려한 무지개색 건물은 최영 장군 사당 올라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추자 초등학교.

 

거기서 좀 더 올라가면 봉골레 산이 나오는데,

이렇게 사진을 찍으니 저 방향으로 먼저 걷고 싶은 충동이 마구마구 일었으나,

계획대로 걷지 않으면 아직 관음사 여파가 남아 있는 내 다리가

내일 배 타기 전까지 15km에 달하는 하추자길을 다 걸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하추자도 방향으로!! 

 

 

수묵화처럼 아련한 원근감으로 섬과 섬이 중첩되어서 파란 바다와 하늘에 길을 내고 있다. 

정말 원 없이 감탄하고 감탄하며 길을 걸은 하루였다.

정말이지 개인적으로는 올레 26코스 중 Top 3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두 갈래길이 나타남. 

올레 리본이나 안내판이 눈에 금방 들어오지 않아서 두리번두리번해야 한다.

추자도는 두리번두리번이 좀 더 많은 올레길이다.

 

 

추자교를 걷는다. 인도가 매우 좁고 휠체어가 다니기는 어렵다. 

 

 

다리는 짧은 편인데 금방 건널 수는 없다. 

다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이러하니...

중간에 서서 한참을 두리번두리번 - 올레 리본 찾으려는 것은 물론 아니고. 

정말 아름다운 섬이라고, 혼자 자꾸 반복 반복 되뇌어봐도 성에 안 차는, 그런 섬이다.

 

 

 

 

 

무인도가 둥둥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드디어 돈대산과 묵리마을로 나뉘는 갈림길에 도착 

여기서 중간 도장이 있는 묵리 슈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하추자 올레를 다 걷고 나면 다시 여기에 반환점처럼 오게 된다. 

 

 

어쩜 이런 색으로 집을 칠할 생각을 하셨을까.

추자도의 집들은 통일된 듯하면서도 또 다 다른 색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 상당하다. 

 

 

담벼락에 이런 액자 그림들이 띄엄띄엄 전시가 되어있다. 

아기자기한 묵리 마을 

 

 

반가운 도장 찍는 곳.

저 강아지는 목줄이 엄청 길다. 

사람을 봐도 짖지도 않고, 반가워하지도 않고 

추자도 이 작은 섬에 살면서 서울 같은 도시의 시크함을 지닌 강아지다. 

 

 

추자도에서 단 하나의 노선만을 달리는 버스가 멈춰서는 정류장. 

 

 

드디어 7km 지점 - 아직 11km를 더 걸어야 한다.

다리가 점점 불안해 오지만, 

제주처럼 중간에 끊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대중교통이 없다.

아, 물론 한 대 있긴 있지만 버스 정류장을 찾아 걸어가는 길을 생각하면

그냥 관음사 하산 상태의 다리를 끌고 계속 걷는 편이 낫다.

 

실은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더라면 콜택시를 불렀을 상황이었다. 

행운의 숫자라는데 내게는 너무 위험했던 7km의 고비.

 

길은 이렇게 좁고 경사지고 돌도 많고,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난이도 '상'이니까. 

 

 

이렇게 걷다 보면

'또' 아름다운 마을 신양리가 나온다. 

 

 

이렇게 예뻐도 되나 싶지? 

 

이만치 와서는 그냥 주저앉아서 잠시 쉬었던 것 같다. 

신양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이미 추자도에 대한 만족도는 정점을 찍었으나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더 아름다운 무언가가 '또' 있겠구나.

 

 

 

멀리 언덕 위에서 보던 건물들을 하나씩 찍어 보았다.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아까의 그 아름다운 풍경 사이사이를 내가 실제로 걷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새롭다. 

 

추자도에서는 사진을 엄청 찍어서 한 번에 다 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오늘의 일기는 일단 여기서 끝. 

 

내일 아침 비행기로 부모님 댁에 가야 하는 일정이 있어서 밤을 새우기는 어려울 것 같고 

하루 종일 언어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공부하고 나니 너무 졸리고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추자도의 사진을 다시 보며 정리를 하니 

마지막으로 남은 다음 한 주가 기대가 된다. 

동쪽의 오름 중에서 어디를 가면 좋을까 신중히 선별 중이다. 

7개월의 제주 걷기도 이제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