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5] 코로나와 발코니
집안에 갇혀서 생활한 지 20여 일이 지났다. 10일까지는 열심히 셌다가, 나중에는 관뒀다. 달이 바뀌니 더 의미 없게 느껴졌다.
바깥보다 실내가 더 추운 곳에서 살다 보니,발코니가 더없이 소중하다. 요즘은 그나마 기온이 올라서 가스히터나 전기난로를 켜지 않은지 3-4일 된것 같다. 발코니에는 볕이 잘 든다. 차갑고 냉정하기 짝이 없던 지난 2월에도 오후의 발코니는 햇볕이 따뜻했다. 요즘 왠만한 빨래는 반나절이면 다 마르고, 무료하기 그지 없을때는 차 한잔 만들어서 발코니 나무의자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낸다.
모두가 갇혀서 지내다 보니 발코니를 통해 알게 되는 이웃집 정보가 쏠쏠하다. 저 집엔 누가 누가 살고, 애들은 몇이고, 몇 시경 발코니에 나와 시간을 보내고…이런 정보들…그리고, 남의 집 빨래 구경도 은근 재미있다. 오늘 앞집 아파트 할아버지는 엊그제 빨랫줄에 걸려있던 옷을 입으셨네. 그럼 괜히 반갑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재미를 즐기는 것이 얼마전 부터 조심스러워졌다. 건물 구조상 아래층 발코니가 잘 보이는데, 그 곳에는 어느 할아버지가 거의 모든 일상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계셨다. 손발톱을 깎는 소리도 들리고, 누군가에게 스카이프로 전화를 거시는지 익숙한 스카이프 콜의 통화대기음도 들리고, 아랍어를 내가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소리도 선명하게 잘 들리는 편이다. 점심을 나와서 드실 때도 계셨다. 이런 저런 음식들이 가득 놓인 접시를 탁자에 놓으시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시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물론 빨래도 자주 널으시고.
사건은 내가 빨래를 널다가 생겼다. 젖은 빨래를 가지고 나와 한 번씩 탈탈 털어서 빨래건조대에 널다가 나도 모르게 세탁물에 남아서 날리던 먼지에 재채기가 난거지. 위에서 재채기 소리가 들리자 할아버지는 뭔가 하고 쳐다보셨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드시던 접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새로 바뀐 전화번호를 두 달쨰 아직도 못 외우면서, 나를 올려다보시던 할아버지의 표정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잊히지 않는다.
빨래 먼지를 털어서 자리를 피하신 걸까, 아시안이 재채기를 해서 자리를 피하신 걸까? 그 다음날 웬 일로 할아버지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셨다. 나도 마음이 쓰였는지 거의 2-3시간 간격으로 발코니에 나가봤는데 역시 할아버지는 나오지 않으셨다. 며칠을 그냥 찜찜한 마음으로 보냈지만, 굳이 할아버지가 나와 계신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통행금지가 시작되기 전에, 아시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코로나라 불리며 길거리에서 위협을 당하던 순간들이… 아직도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좋게 여겨지지도 않았고, 괜히 그의 여유로운 발코니 휴식을 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도 곧 사라졌다.
며칠이 지났고, 통행금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래층은 더이상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발코니에서 빨래를 널 때마다 재채기를 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동네가 조용해서 재채기를 하면 소리가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결코, 내 재치기 소리가 유별나게 큰 건 아니다.
거리는 늘 조용했고, 밤이 되면 다른 집에 불이 켜진 것을 보면서 나 혼자가 아니라는 외로움도 달래고 통행금지로 갇혀 있는 시간을 그럭저럭 잘 버티며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인가,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에 밖에서 누군가 라디오를 켠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 밤에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아니었다. 거실 불을 끄고 조용히 발코니 셔터를 올려 밖으로 나가보니, 아래층 할아버지가 발코니에서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보고 계셨다. 스마트폰의 화면이 아늑한 조명처럼 발코니를 채웠고, 뭔가 유쾌한 영상이었는지 할아버지의 조용조용 숨죽인 웃음도 위층 나의 발코니까지 전해졌다. 다시 발코니 생활을 즐기고 계시는구나, 반갑고 다행이었다.
아래층 할아버지가 낮에도 발코니 생활을 즐기시는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왠지 예전처럼 발코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편안하지 않다. 인종차별을 한 두 번 겪은 것도 아닌데, 아직도 그때 할아버지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를 코로나라고 부르던 아이들의 얼굴은 이미 잊었는데도…
통행금지 속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속에서도 시간은 간다. 나는 의도적으로 새로 바뀐 내 전화번호를 외웠고, 통행금지가 4월 21일까지 연장되었다는 소식에 잠시 좀 더 깊은 무력감에 빠졌고, 배고파서가 아니라 무료해서 냉장고에 손을 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똑같은 자기 합리화 속에 결국은 음식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는 헛된 시도를 하고, 그리고 발코니로 나가본다. 아래층 할아버지네 발코니는 사람은 없지만 빨래로 가득한 건조대가 햇볕을 한 껏 즐기고 있었다.
시간은 간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가 부자나라건 가난한 나라간 공동체로서 겪는 이 아픔의 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좋은 교훈과 실천을 만들어내길 간절히 바라본다. 그리고 질문을 해보는 거지, 나는 개인으로서 이 시간을 이후 어떤 교훈을 발견하고 실천에 옮길 것인가. 여전히 마음의 허전함을 냉장고로 해결하는 바보같은 짓을 반복하는 이 얄팍한 의지를 가지고, 코로나 이후의 나는 얼마만큼 변해 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코로나가 극명하게 깨닫게 해준 가장 중요한 것들, 기본이 되는 것들은 지켜내는 노력은 하고 싶다. 역사는 발전해나가고 있다고 간절히 믿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