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없이 산다

[2021.9.17] 1년 놀아도 안 죽어-띄엄띄엄 제주걷기 7 : 어느새 추석

Matika 2021. 9. 17. 21:11

 

  1. 색달동에 살다 보니 자주 가게 되는 바다 카페. 전망이 좋아서 종종 가곤 하는데, 전망이 좋아서 그런지 실내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실내에서 저 창문으로 내다보는 풍경이 좋아서 항상 실내에 앉는다. (물론 에어컨 때문이기도 하지만 ㅋㅋ) 이런 풍경이 일상이 되는 긴 휴식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인 건가? 


  2. 어느새 추석이다. 내일 오랜만에 4.3 유적지 답사가 있는 날이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비행표를  다음날인 일요일로 바꿨다. 이제 제주에서 지낼 날이 한 달 하고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아쉬운데, 이번 주는 내내 태풍으로 집에만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오늘 오후에서야 겨우 해가 환히 들었고, 나는 눈 오는 날 강아지 마냥 들떠서 이불이니 빨래들을 죄다 햇볕을 쐬어 주려고 베란다에 내놓았다. 나도 겸사겸사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3. 거의 두 달 반 만에 부모님댁에 간다. 색연필을 쓰느라 늘 가지고 다니는 문구용 칼을 이번엔 공항검색대에 걸리지 않게 미리 따로 빼두었다.  공항들은 이렇게 검수된 물건들을 다 어떻게 처리할까? 


  4. 사람이 살아가는데 실제로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 추석 때 부모님 댁에 가져다 놓을 여름 물건과 10월 살이를 위해 가져 올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새삼 느끼게 된다. 옷도 입고 빨고 할 정도의 가짓수면 충분하고, 부엌살림도 먹고 싶은 것 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기본 살림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제주 내려와서 산 살림살이는, (1) 욕실 세숫대야, (2) 국수 채반 (밥은 안 먹어도 면 없이는 못 살지. 아마 살면서 올 한 해가 냉면을 제일 많이 먹은 해 일듯 싶다. 해외 출국 한 번 할 때도 건조 냉면을 최소 5kg씩 챙겨가곤 했다 ㅎㅎ 냉면이 제일 좋아 ^^), (3) 칫솔 꽂이 정도다. 물론 올 한 해는 최대한 쓰레기 줄이기, 불필요한 물건 사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기도 했다. 뿌듯하다. 


  5. 환경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요즘 페이스북 그룹 플라스틱 없이도 잘 산다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  ==> https://www.facebook.com/groups/362534104527640/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스틱을 줄이거나 안쓰기 위해서 매우 다양한 활동과 실천을 하고 있다. 정말 배울 것이 많은 곳이다. 나도 동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어려운 실천도 많다. 예를 들면 샴푸바. 샴푸바로 감은 머리는 이것이 사람의 머리카락인지, 생살을 뜯어내서 피를 보곤 했던, 지금은 다행히 고쳤으나 15년 전까지만 해도 스트레스를 발뒤꿈치에 해소하는 고약한 버릇을 버리지 못했던 시절의 거칠기 짝이 없던 내 발뒤꿈치 이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언제 가는 분명히 내게도 맞는 샴푸바가 나오겠지. 


  6. 본부에서 어제 연락이 왔다. 이제 휴직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서서히 복직 준비를 시작해야 하나보다. 이번에 제안 받은 곳은 아시아라 거리상으로 한국과 가까워 심적으로 왠지 편안하긴 하지만, 업무가 딱히 끌리지는 않는다. 추석 때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일을 좀 쉬려고 생각했었었다. 체력적으로 너무 소진되었었고, 내가 이렇게 일을 해줘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허무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출산이나 육아휴직, 학업 휴직도 아니고 당시 건강 상태에 대한 의사 소견서를 받은 것도 아니어서 휴직이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이렇게 1년 휴직이라는 편안한 조건에서 쉬게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감사하지.

    돌아갈 직장이 없었다면, 아마 곧 구직을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휴가기간을 지금처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구직을 해본 사람은 안다. 젊어서나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서나 '구직'은 쉽지 않다. 아무리 평정심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직'을 하게 되면 여러가지 감정이 몰려든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그렇기 때문에 급여 조건만 같다면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마찬가지 아니냐는 어떤 유력 대선후보의 최근 언사가 상당히 마음 아프다. 청년세대가 꿈을 꾸고, 꿈을 향해 달려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키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할 텐데 대충 어느 정도 급여만 맞추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 싸구려 저질 발언을 듣자니 피로하다. 피로감이 몰려든다. 


  7. 확실히 낮이 짧아졌다. 숙소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논짓물까지 걸어도 되돌아오는 길은 환했던 7월, 8월과는 다르다. 저녁 산책 시간을 6시에서 5시쯤으로 앞당겨야겠다. 논짓물까지 못가고 예래 생태공원 중간쯤에서 길을 돌려야 했다. 하루가 또 이렇게 간다. 큰 사고가 없었고, 마음도 그다지 심란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가운 햇볕에 호들갑을 떠느라 행복했고, 빨래가 즐거웠다. 무탈한 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닐까. 내일 아침은 제주시까지 가야 하는 답사 일정이 있어서 일찍 하루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내일도 무탈이라는 가장 큰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며, 오늘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