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2] 제주 올레 14-1길 저지예술정보화마을에서 오설록 녹차밭까지
이번 주 월요일부터 지금 이 일기를 쓰는 9월 17일 금요일 아침까지 계속 비바람이 극성이었다. 태풍을 알리는 재난 문자로 전화도 바빴고, 어딜 나가지 못하니 몸이 근질근질하고, 빨래를 말릴 수 없어서 미뤄둔 수건들도 거슬렸다.
그러다가 오늘 오후가 되니 환하게 볕이 들면서 비도 그치고, 물론 바람은 여전히 세지만 기분이 확 좋아지는거지. 서둘러 빨래를 돌리고, 이불과 베개도 볕에 내놓아 뽀송뽀송하게 말리는 중이다. 이따 늦은 오후까지도 비가 오지 않으면 저녁에는 동네 산책을 나갈 참이다. 신난다.
올레 14-1길의 시작점인 저지예술 정보화마을은 13길의 끝이고, 14길, 14-1길의 시작점이라 도장을 3개나 한꺼번에 찍을 수 있다. 미리 도장을 찍어두면, 조만간 빨리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기면서 마음이 행복하게 조급해지기 때문에 도장은 찍을 수 있을 때 미리 찍어두는 편이다.
13길, 14길, 14-1길 중 어디를 먼저 걸을까 고민하다가, 한동안 완주의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나마 제일 짧아 하루만에 완주 가능한 14-1길로 정하고 길을 시작했다. 일상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성취감은 정말 중요하다.
늘 친절한 올레.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횡단보도 앞에 아예 이렇게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판을 붙여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화살표가 가리키는 14-1길 방향에는 길이 두 개가 있어서 잠시 우왕좌왕했다.
길을 이렇게 못찾을 수가 있다니.....
아직도, 그리고 이 나이를 먹고도 나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가는 중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길을 완주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라도 모르고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은 마음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곳은 텔레스코프라는 숙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꽤 유명한 곳인가 보더라.
나 같은 장기 투숙객이 부담하기에는 비싸지만, 며칠씩 여행하러 왔다 갔다 한다면 머물러 볼만 하겠다.
텔레스코프를 지나면 이렇게 돌담길이 예쁘고 바닥은 보슬보슬한 흙길을 한참 걷는다.
길이 정말 예쁘다.
드디어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입구.
여기가 문화예술인 마을이라는 것은 이 표지판 말고는 알 길이 없다.
문화예술인들이 조용히 지내시면서 작품활동을 하시나 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걸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저지리는 서귀포시 안덕면과 경계를 이루는 제주시 한경면에 위치한 마을이고,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로 한경면에 있는 마을 중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여 한라산과 가장 가깝다고 한다.
한라산도 오르긴 해야 하는데...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ㅠㅠ
10월 중에는 걸어야 할텐데...
암튼 월림-신평 곶자왈 지대 중에서도 가장 식생 상태가 양호한 지역이라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실제로 걷다 보면 연구 시험림 지역을 거치기도 한다.
나무마다 올레 리본과 비슷한 파란색, 빨간색 리본이 달린 경우가 많아 헷갈린다.
길을 크게 한 번 잃기도 했다 ㅠㅠ
저지곶자왈에 들어서면 말의 향기가 느껴진다.
말똥 냄새가 멀리서부터 불어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콧속을 가득 채우는데,
생각보다 그리 멀리 있지도 않았다.
걷는 길을 너무 말끔하게 포장을 해놔서
걷는 재미가 다소 덜하다.
또 말을 만났다.
저렇게 묶여 있으니 답답하겠다, 싶어 안쓰럽다.
저지곶자왈 연구림을 지나고 문도지오름에 도착.
곶자왈 지역에 나지막하게 솟아 있어서 오르기 어렵지 않다고 한다.
삼나무 조림지와 경작지를 제외하고는 사면이 억새로 덮여 있고,
말 방목지로 이용이 된다고.
그래서 말들이 많았고, 그리고 정상에 오르는 길도 말이 차지하고 있었다.
방목된 말들이 사람을 봐도 움직이지 않고 길을 막고 있어서
저길 지나치다가 말 뒷발에 차이지나 않을까 잠시 서성였다.
여기부터는 사유지라고 한다.
네, 감사한 마음으로 조용히 지나겠습니다.
날이 흐렸었는데, 가끔 해가 나뭇잎 사이로 환하게 들기도 하면서
왠지 몽환적인 분위기에 나타난 말들.
덕분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말들이 나무에 머리를 비벼대고 있는데 간지러운가, 내가 긁어줄까 싶다가,
뒷발이 무서워서 잠시 그냥 대치 상태로 서 있었다.
여기를 지나쳐야 하는데... 길을 저리 두 마리가 막고 있으니...
저들은 개의치 않는 눈싸움을 하다가
살살 있는 듯 없는 듯, 투명망토를 입었다 생각하고 통과를 했다.
안내판대로 문도지오름은 정말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어서 숨이 차지 않았다.
내가 걸었을 때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는데, 웬일로 붐비는(?) 정상.
사람이 있으면 왠지 더 불안 ㅎㅎㅎ
문도지 오름은 곶자왈에 둘러싸여 있다.
정상에서도 내려다 보이는 풍경도 모두 짙은 녹색의 숲이 대부분이고,
어느 쪽 방향이더라, 기억은 안 나지만 풍력발전소 - 거대 바람개비들이 서있는 곳도 보인다.
날이 흐려서 걷기에는 더 수월했고.
문도지오름을 내려오는 길.
한동안 비가 내려서 그런지 길이 약간 미끄럽다.
아까 정상에서 만난, 아이 둘이 있는 4인 가족이 내려오기 어렵지 않을까 싶네.
문도지오름 목장주의 간절한 부탁을 잘 들어드려야지.
그런데 말이 여기까지 내려왔으면 뛰어넘을 것 같은데... 저 높이로 되려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문을 잘 닫아드렸고.
자, 여기서 길을 대박 잃었다.
분명히 왼쪽으로 가라고 했는데,
오른쪽 길이 더 크고 사람 다닌 흔적이 많아서 (정확히는 차가 다닌 흔적이라고 해야 할 듯 ㅠㅠ)
나는 화살표에 신경도 안 쓰고 그냥 오른쪽 길을 걸었지.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걷다가 싸이클 아주머니 부대도 만나고,
나무에 뭔가 작업하시는 분들도 만나고...
그래서 너무 믿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계속 길을 걸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올레 리본이 나타나지 않는 거다.
카카오 맵을 보니 나는 올레길을 벗어나 문도지오름 어디 중간쯤에 있었고.
나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죽고 사는 문제라도 그냥 받아들이고 넘어가자,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다시 길을 되돌아 걷는다.
전체 올레 26길을 2/3 정도 걸었으면 이 정도의 정신 수양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까 그 올레 화살표로 되돌아왔다.
파란색 화살표가 살짝 얄밉다.
그리고 드디어 곶자왈에 들어선다.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제주말로 곶자왈이라고 한다.
보온 보습 효과가 있는 곶자왈은 북쪽 한계 지점에 자라는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남쪽 한계지점에 자라는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라고 한다.
한겨울에도 푸른 숲인 곶자왈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생태계의 허파 역할을 한다고 적혀 있다.
제주 곶자왈이 무분별한 관광개발에 사라지지 않도록 진짜 모두 잘 감시를 해야겠다.
이날 걸은 곶자왈은 정말 촉촉하고 평화로웠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혼자 숲길을 조용히 걷는 시간은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가장 감사한 순간 중 손꼽힌다.
촉촉하면서도 폭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바위 위 이끼들을 손으로 쓸어보고
치유의 숲 해설사님이 가르쳐준 대로 나무를 껴안고 귀를 대보기도 한다.
이 여유로운 시간을 잘 기억해둬야지.
올레길을 처음 걷기 시작한 4월에는 반짝반짝 거리는 해변에 난 길이 좋았는데
이제 이만치 걷고 나니, 제주의 보물은 이 곶자왈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숲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미 거의 끝이 보여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다시 되돌아 걸었다가 나올까...
저기 위에 보이는 올레 리본을 따라 길을 꺾으면 오설록 녹차밭이 보인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고요한 숲길이 너무 아쉬워서 되돌아갈까 싶은 마음이 컸지만,
2시 이후에는 곶자왈이 어두워져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진입금지라는 안내가 있었기에
길을 마무리하고 도착 지점 도장을 찍었다.
오설록 뮤지엄은 완전 관광지라서 어마무시하게 붐볐다.
방금 지나 온 저지 곶자왈의 고요함과는 정반대의 풍경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좋아하는 녹차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가야겠다 싶었지만, 자리 맡기도 힘들었고.
어찌어찌하여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서둘러 돌아왔다.
저지곶자왈에서 머문 시간들이 사라지지 않고 몸 안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어 주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9월 12일의 기록을 다 정리하고 나니
지난 5일 동안 우중충했던 태풍의 시간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날이 환하게 개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 사이사이 조그맣게 걸려있던 중문 바다와 수평선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고.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일단 햇볕이 집안 가득 들어오게 하는 일이 급하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고
빨래를 널고, 이불과 베개도 햇볕과 바람을 쐬어주고 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내 마음에도 햇볕이 가득한 느낌이다.
열어둔 창문 모기장 밖을 보니 잠자리가 열심히 날아다니고 있다.
여름이 이렇게 떠들썩하게 태풍과 함께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제주의 가을을 보고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10월이 한없이 기다려지면서,
9월의 오늘, 하루하루가 또 한 없이 감사하다.